이어폰/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다는 것

중점연구 프로젝트로 해외 저널에 투고할 논문을 한 편 쓰고 있는데 여기서 길게 할 이야기는 아니고, 대충 요약하면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가상의 듣기 방식”virtual listening과 “가상의 소리 듣기”listening to the virtual 사이의 경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허물어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내용이다. 나의 논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이 “이어폰(헤드폰) 현상”인데 공교롭게도 얼마 전 The New Yorker에 올라 온 Amanda Petrusich의 기사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특히 유명 프로듀서 Nick Sansano와의 이메일 인터뷰 내용이 흥미로웠다. Sansano에 따르면 헤드폰으로 듣는 방식이 주가 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헤드폰—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싸구려 헤드폰—이나 컴퓨터,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는 우리[프로듀서]가 음반 제작의 믹싱·마스터링 단계에서 하는 일들의 많은 부분을 바꾸고 있습니다. [중략] 예전에는 헤드폰 테스트는 말 그대로 그저 테스트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헤드폰을 착용하고 믹싱 작업을 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상당수가 헤드폰으로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중략] 이어버드나 소형스피커의 [음향적] 한계 안에 담을 수 있는 음악을 제공해야 합니다.

예컨대 (싸구려) 이어버드earbuds는 낮은 음역대와 높은 음역대를 제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작자는 자연스레 중고 음역대upper-mid range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이 기술에 의해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딱히 부정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Petrusich의 기사도, 내가 쓰고 있는 논문도 “이어폰(헤드폰) 현상”을 비판하기보다는 현상 자체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게 목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술”이 내용을 새롭게 정의하는 일은 늘 있었던 현상이다.1 핵심은 기술과 그 기술이 생산해내는 새로운 컨텐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는가에 있지 않나 싶다. 스마트폰 시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결코 짧지 않은 기사지만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 읽어 볼 만한 가치 있는 기사다.2


  1. 일례로 “라이브 음악”live music이란 개념은 1877년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라이브”로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2. Medium에 올라 온 이 기사에 의하면 블로그 글의 이상적인 길이는 7분 분량이라고 한다. 7분 내에 읽을 수 있는 글이 방문자가 끝까지 읽을 확률이 가장 높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못하는—이유다. 이 또한 기술이 컨텐츠를 재정의하는 사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