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루스킨과 반스의 쇼스타코비치 (feat. 쇼펜하우어의 독서론)

1. 국내 독자들에게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잘 알려진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의 신작 소설 The Noise of Time서평이 뉴욕타임스에 올라왔다. 서평을 읽기 전에 두 번 놀랐는데 우선 올 초에 출간된 소설의 서평이 이제서야 올라왔다는 사실 때문이고,1 또 한 가지 (더욱 놀랐던) 이유는 서평을 쓴 사람이 음악학자 Richard Taruskin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음악학자가 소설을 읽고 쓴 서평이 한 박자 늦게 올라온 것이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2. 음악학자의 문학 비평이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게 다소 생뚱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The Noise of Time의 주인공이 작곡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다. 20세기 러시아 음악이라니. Taruskin이 음악학계의 대표적인 르네상스맨이긴 하지만 이거야말로 그의 전문 분야 아닌가.2

3. Taruskin이 서평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제아무리 소설이라도 이렇게 막 지어내시면 안 됩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말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자.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적 자료를 이용할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초월해 자신의 상상력이 인도하는 곳으로 [이야기를 풀어] 갈 자유가 있지요. (중략) 하지만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소설가는 때로는 있지도 않은 일을 대놓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갈 때도 있습니다. (중략) 반스는 소설가의 자유와 사학자의 권위 두 가지 모두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좇으면서 어느 쪽도 잡지 못하고 있지요.

4. Taruskin의 불만은 언젠가부터 “팩션”(faction)이라는 문학 장르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늘 따라다니는 별책 부록 같은 것이다. 특히나 역사 소설과 사극이 끊임없이 생산·소비되고 “역사”란 단어만 들어도 온 국민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우리 나라에서 팩션에 관한 논쟁은 그리 낯설지 않다.

5. 그래서 내가 반스의 The Noise of Time을 읽지 않을 것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이 글에 마침표를 찍고 포스팅 하자마자 아마존으로 달려가 전자책 구매 버튼을 누를 것이다.3

6. 내가 의식 있는 음악(사)학자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냐면 그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의식 있는 학자란 뜻도 아니다.) 책이란—책을 읽는 행위는—읽고 생각할 때에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Taruskin의 견해 자체가—그것이 옳건 그르건—독서(행위)를 정당화한다. 무슨 얘기냐면 책을 읽을 때 글쓴이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책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난 후의 책임은 독자에게도 있다.

7. 책을 읽으면서—읽고 난 후—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무 근거 없이 반박만 할 거라면 책읽기는 가장 멍청하고 게으른 짓이라는, 다소 괴변처럼 들리는 쇼펜하우어의 독서론을 반박할 방법이 없다.4 물론 쇼펜하우어가 책을 읽지 말라고 권했을리 만무하다.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8.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는 “Reading is nothing more than a substitute for thought of one’s own.” 내 맘대로 풀어쓰면 “책읽기는 스스로 생각하기 귀찮은 사람들이나 하는 게으른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책이 대신 생각해 주기 때문이다. 독서의 가치는 오직 비평적으로 읽을 때에만 발현된다. 그러니까 설령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책일지라도 (이게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비평적으로 읽을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혹은 그럴 의향이 없거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면—독자도 책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9. 아직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은 지켜줘야 하지 않느냐고? 일단 이 주장에는 어른들이 충분한 “판단력”—이라는 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상당히 오만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내 경험상 대부분의 경우 사실도 아니다.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책을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책을 고를 수 있는,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씹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씹어 먹지는 말고…

10. 서평 말미에 달린 Taruskin의 약력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는데 그의 신작 Russian Music at Home and Abroad가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반가운 놀람이다.5 러시아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중요한 오페라 몇 편을 제외하면 내겐 주요 연구 대상도 아니지만 Taruskin의 글이라면 독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의 글이 치열한 책읽기와 사색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고 자신의 글 또한 그렇게 읽히기를 권유하기 때문이다.

11. 독서론에 관한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정작 반스가 그려낸 쇼스타코비치와 이에 대한 Taruskin의 불만을 소개하는 것을 깜빡했는데 이제 와서 문단 재배치까지 해 가며 다시 쓰자니 조금 귀찮기도 하고 (내 기준으로는) 그리 중대한 사항도 아니라 여기에 짧게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쇼스타코비치가 구소련 정부에 저항한 희생자—“순교자”—인지, 아니면 체제 안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정부와의 타협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래된 것임
  • 반스의 쇼스타코비치는—Taruskin에 의하면!—“순교자”(martyr)로 그려지고 있음
  • 하지만—역시 Taruskin에 의하면!—이 논쟁은 이미 음악(사)학계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정리가 된 문제임
  • 고로 반스 당신 그러면 안 됨

Taruskin의 서평은 그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많은 내용을 밀도 높게 다루고 있다. 음악(사)학자, 특히 음악(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1. 영국에서 2016년 1월, 미국과 캐나다에서 같은 해 5월에 출간되었다.

  2. 그건 그렇고 반스는 Taruskin이 누군지 알고 있을까? 음악학계에서나 거물이지 문인도 알 만한—알아야 할—정도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에 한 잔 걸 수 있다.

  3. 우리말 번역본은 아직 소식이 없다. 더구나 소설의 주인공이 음악가—그것도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라면 아무리 반스의 신작이라도 출판사 입장에서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4. 우리 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으로 번역되어 나온 Parerga and Paralipomena (1851)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본가에 있어 지금 확인할 수 없고 Thomas Bailey Saunders의 영문 번역본은 Internet Archive나 Wikisource 등의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5. UC Press에서 출간되는 모양인데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검색은 되지만 먹통이고 아마존에 따르면 9월 13일부터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