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적 지식”의 미덕

지난 달 『스테이션 일레븐』(Station Eleven)을 완독한 후 잠자리 소설로 읽기 시작한 책은 James P. Hogan의 1977년작 Inherit the Stars.1 소설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그 다음 책을 선택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린다. Inherit the Stars로 굳히기 전에 집적댔던 책은 Jonathan Franzen의 Freedom (2010)과 Peter Swanson의 The Kind Worth Killing (2015) 두 권.2 Franzen의 Freedom은 워낙 명성이 자자한 소설이라 별 고민 없이 집어 들었고 명작임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먹먹함이란. 이건 일단 아껴둔다. 반면 Swanson의 소설은 자극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결론은 세 권 모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인데 그냥 어쩌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Inherit the Stars를 읽고 있었다는 것. 서론이 길었다.

Inherit the Stars의 출발점은 가까운 미래에 달에서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한 구가 우주복을 입은 채 발견되었는데 사망 추정 시점이 5만 년 전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과학 소설이다.

그런데 내게는 과학 소설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학자들이 어떤 논리적인—과학적인—접근법으로 “찰리”(Charlie)라는 닉네임이 붙은 유해의 정체(근원)를 밝혀내는지, 이들이 때로는 어떻게 자신(만)의 이론에 갖혀 다른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지, 공동 연구에서 소통 혹은 정보 교환의 부재가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하는지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또 한편으로는 (내가 속해 있기도 한) 학자들의 세계를 다룬 인문 소설처럼 읽힌다.

공교롭게도 Inherit the Stars를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국내에서는 그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과학(장르) 소설이 주류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기사에 소개된 소설들은 아직 읽어 보지 못한 관계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Hogan의 Inherit the Stars가 내 눈높이를 어지간히 높여 놓았다는 점이다. ‘인문’ 소설처럼 읽힌다고 했지만 ‘과학’ 소설 본연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데 이건 ‘소설’이라기 보다 그냥 ‘과학서’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묘사에 어설픔이 없다.3 제임스 P. 호건이라는 작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3분의 2가량을 읽은 현재 “찰리”의 정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설마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게 뭔가 싶어 알아보니 이 소설은 Giants 시리즈(5부작)의 1권이었다는… 1권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2권을 (연이어)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족: 위의 조선일보 기사 말미에 뜬금없이 Station Eleven이 언급되는데 이 소설이 ‘SF 소설’인지에 관한 문제와 저자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론한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장르 구분 그게 뭣이 중헌디?” 정도인데, 나도 뜬금없이 끼어들자면 Station Eleven은 절대 SF 소설이 아니다.


  1. 국내에는 『별의 계승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독자평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닌데 번역 문제가 거론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 조차도 종종 벌어지는 일인지라 대개 내가 직접 읽어 보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지만 소위 ‘장르 소설’의 번역이 취약하다는 사실은 경험상 공감하는 바라 망설임 없이 원서(전자책)를 집어 들었다.

  2. 두 권 모두 각각 『자유』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집적댄 책은 원서(전자책)이다.

  3. 이렇게 과학적 묘사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과학 소설을 일컬어 “hard science fiction”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