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응시’, 그리고 소리연구

John Mowitt, Sounds: The Ambient Humanitie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5).


제목과 출판사 소개만 보고 찜했다가 (전자책 샘플이 제공하는) 서문을 읽어 본 후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구입한 책이다. 일단 제목에 복수형—“소리들”(sounds)—을 사용한 것부터 거슬린다. “소리”를 다향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다각도로 살펴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는 또 어떻고? 첫 문장부터 “이 책은 소리에 관한 책이 아니”란다. 제목에 “소리”를 떡하니 집어 넣고 소리에 관한 책이 아니라니. 너무 멋부리는 것 아닌가? 그럼 무엇에 관한 책인데? 다음 문장은 이렇다: “이 책은 소리들이 요구하는 울림과 반응를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리들의 연구이다.” 뭐 좋다. 이것 역시 사실상 별 의미 없는 수사修辭일 뿐이다.

그런데 출판사 소개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책이 점점 궁금해진다. 현존하는 소리연구(sound studies) 모델의 비평을 담았다는데, 개인적으로 소리연구가 그 나름의 역사—혹은 전통—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매력적인 모델이 없다는 데 통감하는 입장이라 저자의 시각이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listening”과 “hearing”을 넘어 소리를 “audit”한다는 것의 의미를 소리연구의 개념 안에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 패러다임을 사용해 풀어내고 있다고 하니 이 “패러다임”이 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패러다임”이 뭔지는 서문을 읽다 보면 금방 알게 된다. 바로 라캉Jacques Lacan의 “응시”gaze 개념이다. 저자의 얘기를 먼저 정리하면 라캉의 “응시” 개념이 시각중심의 문화를 읽어내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반면 소리연구에는 이에 상응하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맞다면 그동안 소리연구가 왜 그토록 “시각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설명이 된다. 하지만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얘기는 소리연구에 이러한 개념이 없다는 게 아니라—이게 포인트다—분명 있을 텐데 그게 아직까지 하나의 단어(용어)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얘기다.1 그래서 이 책은 소리연구에서 응시와 “유사한”analogous 개념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 대목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이유는 나도 똑같은—”비슷한”이 아니라—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년 3월 IMS에서 발표 예정인 논문의 제목에도 “‘aural’ gaze”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나 역시 “응시”에 대응하는 개념을 한 단어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은유에 기댄 것이다. 내 논문의 전제는 시각중심적 개념인 “응시”에 대응하는 개념이 소리에도 있다는 것인데, 올해 1월 초록을 제출하기 전 지인들에게 초안을 보여주고 조언을 구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하지만 (라캉의) ‘응시’는 기본적으로 시각중심적 개념이잖아? 이걸 어떻게 ‘소리’로 환원할 건데?”였다. 아주 살짝 소심해졌다가 그냥 밀어붙여 좋은 결과를 얻긴 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큰 용기를 준다. Mowitt의 책이 반가운 이유다. (물론 걱정도 동시에 몰려오지만…)

이제 할 일은 Mowitt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썰을 푸는지, 끝까지 읽고 책을 덮었을 때도 나와 같은 얘기였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발표가 내년 3월이라 준비는 1–2월에 바싹 할 계획이었는데 지금부터라도 틈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 봐야겠다.

서문을 계속 읽다 보면 꼭 “응시”에 관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저자가 얼마나 심도 있게 연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짧은 서문에서 어지간한 중요한 소리연구 문헌은 모두 언급해 가며 이에 대한 비평까지 담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라캉에 딱히 관심이 없더라도 소리연구를 하는 이에게는 유용한 문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Mowitt의 글이 기본적으로 철학·현상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소리연구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것처럼 보이는—이유는 이를 받쳐 줄 만한 강력한 이론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프랑스 철학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저자의 서문이 “이번에는 혹시?”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1년 넘게 소리연구를 공부하면서 나름 유식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가슴 떨리게 하는 ‘한 방’은 경험하지 못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1. 그래서 “응시”에 대응하는 단어가 위에 언급한 “audit”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