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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듣다(를 읽다)

1. 대학원에 진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위 논문은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가장 길고 끔찍한 중요한 글 중 하나다. 특히 인문계열 박사학위 논문이라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분량’에 압도되기 쉬운데, 오죽하면 이 작업 후에는 석사학위 논문이 그냥(?) 기말소논문 정도로 보인다는 말이 있을까. 그런데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2. 지도교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박사학위 논문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게 될 가장 특수한 종류의 글”이라고. 당시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1 시간이 지나면서 박사학위 논문이 “특수한” 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3.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러니까 하나의 구체적인 주제를 붙잡고 ‘갈 데까지 가 보는’ 작업이다. 이는 모든 연구와 그 결과물인 논문이나 학술서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정식으로 프로 무대(?)에 진출하기 전에 쓰는 박사학위 논문에는 약간 다른 종류의 ‘엄격함’이 요구된다.

4. 평가 기준이야 나라, 학교, 전공, 지도교수, 심지어 심사위원마다 제각각이겠지만, 너무 당연하거나 지나친 기준은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문헌조사(literature review)의 완결성’이다.

5. 논문 어딘가에 ‘문헌조사’ 파트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2 여기서 말하는 문헌조사의 완결성은 논문 전반에 걸쳐 주제와 관련된 핵심 문헌이 충분히 검토·논의되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예컨대 X라는 주제로 논문을 쓸 때 학계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인정받는 Y 학자의 글 Z를 논의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6.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는 (1) 많이 읽고 (2) 그 중 핵심 문헌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3)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같은지를 글로 정리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지도교수의 조언이나 약간의 센스가 있다면 (2)로 먼저 가거나 갈 수 있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파악한 핵심 문헌은 결국 또 직접 읽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나처럼 영원히 고통 받으며 읽기만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나도 아슬아슬했다.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해당 주제에 관한 연구를 철저히 조망해 가며 자신의 연구가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논리적으로 풀어가다 보면 글은 자연히 길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혹은 그래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적어도 그 시점에는) 해당 분야의 주요 문헌을 줄줄이 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정작 하려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는 지금부터인데…

7. 그렇게 나름대로 빡세게 조사를 하고,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며 피드백도 받고, 학위논문 심사까지 거쳐도 피해가는 문헌이 꼭 나타난다. 이번 방학 동안 읽을 책(연구용)을 고르던 중 발견한, 언제 구입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Michael P. Steinberg의 2004년 저서 Listening to Reason: Culture, Subjectivity, and Nineteenth-Century Music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3

8. 지금 보면 어떻게 놓쳤을까 싶을 정도로 논문을 쓸 때 만났더라면 도움이 되었을 만한 책이다. 예컨대 제1장 “Staging Subjectivity in the Mozart / Da Ponte Operas”에서 저자는 모차르트가 다 폰테와 함께 쓴 자신의 오페라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된 전통적인 세상에 청각적 근대성을 대치對峙시키는 과정을 논의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화사 연구’인 책 전체의 논지와도 연결되는데,4 흔히 ‘긴 19세기'(the long nineteenth century)로 표현되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주체성이 음악으로 “구체화”(embodied)되었다는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 10년도 넘은 책인 만큼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주장이겠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 중요한 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일 테니까.

9. 내 논문은 문화사 연구와는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놓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당시의 나에게 이 책의 키워드인 ‘주체성'(subjectivity)이 지금과는 달리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지난 2년 동안 읽고 듣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나의 학자로서의 ‘정[주]체성’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건 “그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에 감사하고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뭐? 결론이 이상하잖아..? 박사학위 논문에서 했던 방식의 오페라 연구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1.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2. 이 역시 전공에 따른 기준/표준이 있을 뿐이다.

  3. 고백하건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 그래서 제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