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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속 병든 영웅들

1. 박사학위 논문이 마무리 되어 가던 시기에, 그러니까 논문 제출 후 심사를 기다리던 시기에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아무래도 박사학위 논문을 몇 년이고 울궈먹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더 이상(?) 그럴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을 발전시켜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도교수님께서 종종 말씀하셨다.

2. 박사학위 논문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일(job)이 있는 곳으로 가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얘기하기로 하고. 예컨대 내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극히 부분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지만 충분히 독립된 연구가 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오페라 속 ‘광기의 장면’(mad scenes)이다.

3. 당시 짧고 굵게 연구를 해 본 바로는 오페라 속 광기의 장면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다룬 연구는 사실상 전무했다. 물론 특정 오페라의 특정 장면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는 적지 않았지만, 오페라 속 광기의 장면의 ‘역사’를 조망하기에는 구멍이 너무 많았다.

4. 그래서 내 나름의 기준으로 광기에 대한 정의를 느슨하게 내린 후 정리를 해 보았는데 광기의 장면을 담은 오페라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아래 그림 참조). 19세기 오페라에서 광기, 특히 ‘여성 광기’의 장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는 이른바 광기의 시대였다. 이는 비단 오페라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이나 다른 예술 영역, 심지어 의학과 같은 非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컨대 18세기 오페라에서 광기의 장면이 등장한다면, 그것도 여성이 아닌 ‘남성 광기’를 다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기까지가 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구체적인 주제가 되려면 물론 더 좁혀야 한다.

WorkFlowy에 시대별로 분류, 정리해 둔 오페라 속 광기의 장면들. (각 파트별 하위 항목, 즉 세부 목록은 공개하지 않는다.1) 연구가 “2014년 10월 6일”에 멈춰있다.

5. 그래서 이렇게 정리를 해 두고 샘플 연구를 진행하던 중 기다리던 학위논문 심사가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최종 수정, 강의, 귀국, (소리)연구, 또 강의, 학술대회 발표, 논문 집필, 다시 강의가 이어지면서 이 연구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2 물론 그 와중에 마음 한 편에는 계속 “해야지.. 해야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6. 그러다가 만나게 된 책이 John Cordingly의 Disordered Heroes in Opera: A Psychiatric Report다. 어제 포스팅한 Listening to Reason과 마찬가지로 언제 구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벌써 그래서 어떻게 하냐.. 출간년월이 2015년 10월인 것으로 봐서는 그 해 겨울이 아니었나 싶다.

7. 대개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을 동시에 보이게 된다. 첫 번째는 당연히 “이런 젠장..” 선수를 빼앗겼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두 번째 반응은 알 수 없는 ‘반가움’, ‘기대감’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이 연구를 내 연구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8. 사실 출판사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저자 때문에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주제가 주제인 만큼 속은 셈 치고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저자는 오페라 학자, 심지어 음악학자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psychiatrist)라고. 그런데 그렇다면 내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음악학자 입장에서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음악에 관한 게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 다루는 주제가 ‘광기’라면 더욱 그렇다.

9.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광기’(madness)라는 표현 대신 ‘정신장애’(mental disorder)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1장 “Disordered not Mad”에서는 이 둘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광기’ 대신 ‘정신장애’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제2장부터는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 유형별로 묶인 사례연구들인데, 저자가 분석하는 오페라와 등장인물은 내 리스트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에서 다루는 등장인물이 모두 ‘남자’라는 것. 다시 한 번 젠장.. 마지막으로 책 말미에는 광기의 장면을 담고 있는 오페라 목록이 부록처럼 들어 있는데, 이마저도 내가 구축한 목록보다 훨씬 풍부하다. 망했어요. ㅠㅠ

10. 요즘 다시 오페라 연구를 재개하려는 티를 내고 있다. 한동안 하지 못하면서 초조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귀국 후에는 곧바로 소리연구에 뛰어들어야 했고 처음 하는 작업이었던 만큼 나름대로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로 발전시킨 학술논문 세 편을 발표했고, 소리연구도 이제는 제대로 된 논문을 쓸 정도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세부적인 논문 투고 계획까지 잡히다 보니 슬슬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연구에도 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일 테지. 당장 시작하고 싶지만 일단 써야 할 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그것부터 해치우자! 근데 해치우고 나면 방학이 끝난다..


  1. 딱히 비밀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워낙 x판인 관계로..

  2. “Life gets in the way.” 그냥 이 한 마디로 깔끔히 정리된다.

  3.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동진, 『이동진 독서법: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고양: 예담, 2017), “한 번에 열 권 읽기” 中. 전자책이라 인용 페이지 수 대신 장章 제목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