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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단위로 인생을 계획한다는 것의 의미

1. 어제 포스팅에서 다짐한 대로 오늘 아침에는 꼬박 3시간 동안 글을 썼다. 평소보다 40분에서 1시간 정도 더 작업한 결과는 겨우(?) 원고지 7매… 허탈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동안 글을 쓰면서 새로 수집한 자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이쯤에서 한 번 정리하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잃어버리거나 모아 놓고 사용하지 못할 판이었다. 자료 수집과 정리는 가급적이면 집필 시간과 분리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이 급했는지 오늘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2. 사실 유혹에 넘어갔다기 보다는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더 정확히는, 오늘 작업한 원고는 글이 전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원고 전체의 구조가 머리 속에 없으니 어디에 무엇을 더 써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자료 정리와 더불어 원고의 구조를 다시 다듬고 구멍 찾는 일을 했다.

3. 구멍을 찾으면 채울 내용이 있거나 할 말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오늘 내 경우는 후자에 가까웠는데 슬슬 인풋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단언컨대 인풋과 아웃풋의 비율이 100:1은 되어야 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주장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1 그래서 (역시) 집필 시간에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논문·책 ‘읽기’를 병행했다. 그냥 쉽게 말하면 읽으면서 썼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원고지 7매라도 쓴 게 용하다고 해야 하나?

4. 소중한 집필 시간에 자료 정리랍시고 적잖은 시간을 투자한 게 아까울 법도 하지만 정리의 목적이 결국 어떤 논문·책을 더 읽어야 하는지 파악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뻘짓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글을 쓰면서 새로 알게 되는 저자와 문헌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어느 순간 내 손을 벗어나기 마련인데 그렇게 되기 전에 붙잡았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5. 무슨 대단한 결의로 오전 글쓰기 시간을 1시간 늘린 것 같지만 사실 오늘은 오후에 번역 원고 마감이 있어 오전에 1시간이라도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요즘 쓰고 있는 4~5편의 글 중 유일하게 ‘돈 받고 하는 일’이라 대충할 수도 없었고. 돈 주면 밥값은 한다…

6. 지난 2주 동안 계획에 전혀 없던 적금을 3개(!)나 드는 바람에 당장 9월 생계에 지장이 생겼다. ‘보험’이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학기마다 일과 수입이 급변하기 때문에 6개월 단위로 예산을 짜야 한다. 예컨대 방학 기간인 7~8월/1~2월에는 수입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매년 5월/11월 중순쯤에는 방학 기간뿐만 아니라 중단됐던 강의료가 다시 들어오는 9월/3월의 25일까지 버틸 수 있도록 지출 계획을 세워야 한다.2 게다가 맡기로 했던 강의가 개강과 동시에 폐강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3 이 부분도 감안해서 계획해야 한다. 그래도 내 예산 편성은 정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9월 월급날까지 딱 계획 없이 가입한 적금만큼의 구멍이 생겼다. 과도한 적금 가입도 가계에 해롭습니다…

7. 그렇다고 8월말 계획된 휴가(여행)를 철회할 수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며 이 정도의 위기는 숱하게 겪었다. 휴가 가서 계획했던 만큼 와이프와 함께 신나게 먹고 마시며 놀거다.4

8. 그나마 지금은 연구소 월급이 있어 방학을 무난히 넘길 수 있는 것에 감사하지만, 이것도 내년 8월이면 계약이 종료된다.5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1년 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막 자다 깬다… 부리나케 적금을 가입한 결정적인 이유다. 진작 하지 그랬어…

9. 언젠가 평소 즐겨 듣는 야구 팟캐스트의 진행자가 야구업계에 종사하면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인생을 시즌 단위로 살 수 있다는, 다소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요는 평균적인 직장인들이 1년 365일을 사실상 똑같이 사는 데에 반해 자기들은 야구가 시작되는 4월부터 10~11월까지의 ‘시즌’과 ‘오프 시즌’에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삶이 단조롭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초등학교 입학 후로는 (군대 2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학교에 몸담고 있었기에 1년을 학기 단위로 사는 데 익숙한데, 그것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생각하며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결론은? ‘오프 시즌’에 할 일을 찾아야 한다!

10. 여기까지 읽었다면 읽느라 고생한 독자들을 위해 선물(?) 하나 남기고 간다. 오늘 작업한 원고는 게임음악연구를 개괄槪括하는 글인데, 이미 읽었거나 읽고 있는 글의 참고문헌 목록이다. 막상 읽고 보면 생각보다 훌륭한, 주옥같은 글로 가득하다.


  1. 내 다치바나 다카시 책들이 전부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본가에 있으려나? 『지식의 단련법』이 아니었나 싶은데 정확한 출처는 나중에 책 찾으면 밝히는 걸로.

  2. 사실 계획은 학기 시작과 동시에 세우고 5월/11월에는 변동사항에 대처하는 식이다.

  3. 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4. 그런데 9월 월급 받자마자 10월 첫 째주에 추석을 맞는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예산을 다시 짜야 한다…

  5. 정확히 말하면 연구소의 3년 연구사업이 종료되는 것으로, 연구소 사업이 3년 연장될 것인지가 관건이고 내 계약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구소가 없으면 연구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