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의 소리를 듣다

1. 지난 주말에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의 기사 “편의점에서 세상을 쓰다”를 뒤늦게 접하고 부리나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2016)을 꺼내 보았다. 오랜전에 구입해 놓고 미처 펼쳐 보지 못한 책. 늘 그렇듯 와이프가 먼저 읽어버렸다.

2. “소설 『편의점 인간』은 ‘편의점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기사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문장이다. 소리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대목에서 멈칫하게 된다. 직업병이겠지. 더군다나 요즘 한창 만지작거리고 있는 연구 주제가 ‘문학 작품 속 소리환경’(textual soundscape)인 관계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3. 과연. 첫 문장이 아니라 도입부 전체가 ‘소리’에 관한 묘사로 가득하다. 다음은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단이다.

편의점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손님이 들어오는 차임벨 소리에, 가게 안을 흐르는 유선방송에서 신상품을 소개하는 아이돌의 목소리. 점원들이 부르는 소리,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 바구니에 물건을 넣는 소리, 빵 봉지 쥐는 소리, 가게 안을 돌아다니는 하이힐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뒤섞여 ‘편의점의 소리’가 되어 내 고막에 거침없이 와 닿는다. (5)

4. 사실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만히 들어보면 정말 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지..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단에서 작가의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장의 페트병이 하나 팔리고, 대신 그 안에 있던 페트병이 롤러로 굴러 오는, 데구루루 하는 작은 소리에 얼굴을 든다. 차가운 음료를 마지막으로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그 소리에 반응하여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5–6)

5. 아, 그러니까 ‘소리’로 손님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편의점 알바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디테일이다. 작가 자신이 오랜 기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습득한 것이리라. 그나저나 “차가운 음료를 마지막으로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는 손님”은 나뿐인 줄 알았는데…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다. 소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게 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소리에서 정보를 얻으면서 내 몸은 방금 납품된 주먹밥을 늘어놓고 있다. (6)

6. “소리에서 정보를 얻으면서”라… ‘음향인식론’(acoustemology)이라는 말이 있다. ‘음향’(acoustics)과 ‘인식론’(epistemology)의 합성어로, 1992년에 스티븐 펠드(Steven Feld)가 주창한 개념이다.1 그냥 쉽게 풀어쓰면 ‘앎의 방식으로서의 소리’ 정도 되려나.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 속 주인공이 소리 정보를 통해 손님 응대에 대비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앎의 방식으로서의 소리’는 유효하다.

짤랑하는 작은 동전 소리에 고개를 돌려 계산대 쪽으로 눈길을 던진다. 손바닥이나 주머니 속에서 동전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은 담배나 신문을 재빨리 사서 돌아가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돈 소리에는 민감하다. (6)

7.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음향인식론’을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앎의 방식으로서의 소리’에서 펠드가 말하는 ‘안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정보 수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컨대 소설 속 다음 문장을 보라.

가게 안에서 하는 ‘말 걸기’도 실제로 ‘손님’이 있는 가게 안에서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메아리쳤다.

‘손님’이 이렇게 소리를 내는 생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목소리, 과자 봉지를 바구니에 던져 넣는 소리, 차가운 음료가 들어 있는 냉장고 문 여는 소리. 나는 손님들이 내는 소리에 압도당하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어서 오십시오!”를 되풀이해서 외쳤다. (24)

8. 편의점 점원이 연수 기간을 마치고 실전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 달라지는 소리환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나’(self)라는 주체 역시 달라진 환경과 공명하며 새롭게 정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손님들이 내는 소리에 압도당하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후루쿠라의 모습은 이전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9. 이를 전문 용어로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이라고 하는데,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계맺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개소리 뜻이다. 스티븐 펠드가 음향인식론을 주창했을 때 기초한 이론이 바로 관계적 존재론이다.2 그러니까 단순히 ‘정보’로서의 소리에만 주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소리’를 주인공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차임벨 소리가 교회 종소리로 들린다. 문을 열면 빛의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계속 돌아가는, 확고하게 정상적인 세계. 나는 빛으로 가득 찬 이 상자 속 세계를 믿고 있다. (41)

10. 편의점이 세상의 전부인 주인공 후루쿠라에게 차임벨 소리는 어쩌면 정말 종교적으로, 신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는 몇 페이지 후 아침 조회 시간에 “6대 접객 용어와 맹세의 말을 제창”(59)하는 것을 두고 “……무슨 종교 같아”(60)라고 중얼거리는 새 인물 시하라의 목소리와 묘하게 대치對峙된다.

11. 노트 정리를 해 가며 느긋하게 1시간 정도 읽었는데 책의 3분의 1을 읽었다. 그러니까 빨리 읽는 사람이 그냥 쭉 읽으면 1시간 반 정도면 독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밀도는 높지 않다. 편의상 소리와 관련된 부분만 일부 발췌해 이곳에 남기지만 소리와 관계없이 좋은 문장들, 울림 있는 ‘소리’로 가득하다. 내가 이 책을 구입했을 때만 해도 없었던 전자책도 나온 것 같으니 일독을 권한다. 마침 작가의 새 소설 『소멸인간』(2015)이 번역·출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며칠 전의 감동이 가시기 전에 몇 자 남긴다.

(사족: 위의 글은 현재 집필 중인 소리연구 원고의 도입부를 일부 요약하여 소개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소설 『편의점 인간』의 소리 연구 논문을 준비 중이다.)


  1. Steven Feld, “Acoustemology,” in Keywords in Sound, ed. David Novak and Matt Sakakeen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5), 12; Steven Feld, “Waterfalls of Song: An Acoustemology of Place Resounding in Bosavi, Papua New Guinea,” in Senses of Place, ed. Steven Feld and Keith Basso (Santa Fe, NM: School of American Research Press, 1996), 91–135.

  2. Feld, “Acoustemology,”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