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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단조로움”이 주는 울림

1. 고백하건대 지루해서 읽다 말았다. 이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이야기다. 애초에 그의 소설을 집어 들었던 동기부터 그다지 ‘순수’(?)하지 못했는데 작년 봄에 보다 만 일드 《나를 보내지 마》(2016)가 계기였다. 아야세 하루카 팬이다… 이보다 훨씬 전에 원작과 조금 더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영화 Never Let Me Go (2010)가 개봉되었지만 제목 외에는 아무 정보도 관심도 없었던 터라 모르는 영화나 마찬가지였고. 일드로 먼저 접한 소설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2. 당장 원서 Never Let Me Go (2005)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소설은 드라마를 (3화까지만) 보고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적당히 무거운 궁서체의 SF 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예상을 뛰어넘는 무게감은 차치하고. The New Yorker의 비평가 James Wood의 표현을 빌면 이 소설의 “단조로움”(blandness)은 독자에게 적어도 “처음에는 좌절감”(initially frustrating)을 안겨준다.1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처음에는”이라는 조건이 전제하는 것처럼 조금 더 읽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대신 서평을 남겼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당시에는 극 초반의 단조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은 것이 사실이다. Wood가 “거의 완벽한 책”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은 The Remains of the Day (1989)도 시도해 보았지만 이 역시 내게는 무리였다.

3. 인용한 Wood의 기사 제목은 “Kazuo Ishiguro, the New Nobel Laureate, Has Supremely Done His Own Kind of Thing”이다. 제목 그대로 “문학적 유행이나 시장의 요구,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비평가의 몰이해에도 차분히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단상이다. 읽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198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역시 같은)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11–1993)과의 비교로 시작하는 Wood의 글이 내게는 호의적으로 읽힌다.

4. 누구도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도 민음사 이시구로 본인이리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어째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예상하지 않았나요?”라는 예술담당편집장씩이나 되는 양반의 멍청한 질문에 “그런 것을 왜 예상하겠어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고 [노벨상 수상 같은 일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의연히 답하는 그의 멋진 영국 액센트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노벨상 수상은 분명 영광이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듯이, 마치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잘 쓰는 데 정신이 팔려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듯이.

5. 이시구로의 작품 중에는 ‘음악’을 소재로 쓴 소설도 있는데, 이미 소장하고 있던 소설집 Nocturnes (2009)는 수상 소식을 접하고 바로 꺼내 읽어 보았다. 단편집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묘한 의무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잘 읽힌다. 하지만 이보다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장편 소설 The Unconsoled (1995)가 더욱 궁금한데 언제 기회가 되면 구입해서 도전해 볼 생각이다.

6. 이시구로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을 당시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말 번역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민음사에서 그의 작품을 꾸준히 번역·출간해 왔다. 결코 다작(多作)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작가인지라 앞서 언급한 소설을 포함한 작품 대부분이 나와 있는 것 같은데 출판사는 물론이고 온·오프라인 서점은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한 모양새다. 왜 하필 황금 연휴에 발표를… 이시구로 소설의 “단조로움”이 주는 감동을 음미하며 남은 연휴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서점 직원들은 연휴 막바지에 들이닥친 복병으로 죽을 맛이겠지만.


  1. 물론 그 “단조로움”이 Wood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성공 요인이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