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P?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18년 5월 28일 첫 번째 방송

2018년 9월 2일부터 14일까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조금 특별한 음악 콩쿠르가 열렸습니다. 제1회 쇼팽 국제 시대악기 콩쿠르(The 1st International Chopin Competition on Period Instruments). 타이틀에 ‘쇼팽’이 들어가는 콩쿠르가 워낙 많아 이것도 유사품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부터 먼저 올라가지만 일단 주최 기관의 권위는 확실합니다. 국립 프레데리크 쇼팽 협회(Fryderyk Chopin Institute). 조성진 씨가 우승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관장 기관이죠. 이번 대회는 폴란드 독립 100주년에 맞춰 기획했다는군요.

온다 리쿠의 장편 소설 『꿀벌과 천둥』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익히 아실 겁니다. 국제 콩쿠르라는 게 스타 발굴, 지역 경제 발전 등 여러 가지 (음악 외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 콩쿠르의 ‘음악적’ 목적은 명확합니다. 시대악기 연주의 ‘대중화’. 그런데 쇼팽이 ‘시대악기 연주’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작곡가는 아닙니다. 시대악기 연주회나 음반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18세기 이전 음악인 경우가 많죠. 하지만 쇼팽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70년. 시대악기(period instrument)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푼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세기 피아노는 시대악기가 틀림없습니다.

‘시대악기 연주’와 자주 혼동하고 혼용해 사용하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같지 않은) 표현 가운데 ‘원전 연주’(authentic performance)가 있습니다. 음악이 생산, 소비된 그 시대 방식으로 연주한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음악학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HIP로 줄여서 부릅니다. (에이치-아이-피. ‘힙’이라고 읽지 않습니다.) 정의 자체가 쉽지 않은 ‘원전’이라는 단어는 어폐가 있고, ‘시대악기’는 음악보다 ‘도구’가 지나치게 부각되기 때문일까요?

다시 제1회 쇼팽 국제 시대악기 콩쿠르 이야기로 돌아가서. 참가자는 국립 프레데리크 쇼팽 협회 소장 19세기 피아노 가운데 한 대를 선택해 연주해야 합니다. 다양한 연식(年式)의 에라르(Erard), 플레옐(Pleyel) 피아노와 그라프(Graf), 브로드우드(Broadwood) 피아노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참가자들 사이에선 1842년 플레옐이 단연 인기더군요.) 쇼팽 국제 콩쿠르와는 달리 본선 1차 라운드에서는 쇼팽 외의 (폴란드) 작곡가도 포함되지만 2차부터 결승까지는 오로지 쇼팽의 작품만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됩니다.

이쯤 되면 시대악기 연주 콩쿠르의 심사 기준이 궁금해지죠. 단순히 악기의 문제로 치부하기 쉬운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컨대 1842년 에라르 피아노에서만 가능한(그리고 가능하지 않은) 연주 기법이 존재합니다. 이는 프레이징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다이내믹 표현부터 페달 주법까지, 모든 게 오늘날의 피아노 연주와는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음악이 만들어진다는 뜻이죠.

자연히 총 10명의 시대악기 연주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책임도 무거워집니다. 이 가운데 토비아스 코흐(Tobias Koch)와 당 타이 손(Dang Thai Son)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익숙한 이름이죠. 코흐는 시대악기 전문 연주자로 정평이 난 피아니스트고, 당 타이 손은 아시다시피 제10회(1980)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이 네덜란드의 고음악 단체 18세기 오케스트라(Orchestra of the Eighteenth Century)와 함께 1849년 에라르 피아노로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은 언제 들어도 색다릅니다. 아쉽게도 이 앨범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음원을 제공하지 않아 알렉산더 론퀴흐(Alexander Lonquich)가 같은 피아노로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F단조, Op. 21, 1악장, 마에스트로소를 들어 볼까요.

Fryderyk Chopin: Koncert fortepianowy in F Minor, Op. 21: I. Maestroso. Video by Alexander Lonquich, Orchestre des Champs-Élysées, Philippe Herreweghe – Topic

토비아스 코흐가 1849년 에라르 피아노로 연주한 쇼팽 마주르카 4번, F단조, Op. 68 역시 별미죠. 이 곡은 유독 에라르 피아노의 음색과 잘 어울립니다. 실제로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음반으로 접하더라도 19세기 에라르 피아노의 음색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Fryderyk Chopin: Mazurka No. 4 in F Minor, Op. 68. Video by Tobias Koch – Topic

어떤가요? 19세기 피아노 소리를 처음 접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냥 좀 어딘지 약간 고장 난 피아노 같다는 것. 먹먹하게 들리기도 하고요. 늘어난 카세트테이프 소리 같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우리 귀가 금방 적응을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에라르 피아노로 연주한 앨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난 후 같은 곡을 현대 피아노 연주로 들으면 도리어 후자가 좀 어색하게, 심지어는 차갑게 들리기도 합니다.

흔하지 않은 기회라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물론 저는 집에서 봤습니다.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 조성진 씨가 우승한 제17회 콩쿠르 당시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가 호평을 받았던 터라 이번 대회도 동일하게 라이브 스트리밍을 해 주더군요. 아카이브도 잘 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들러서 감상해 보세요. 콩쿠르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특유의 ‘공기’까지 전달해 주지는 못 하지만 색다른 경험이 될 겁니다.

마무리하면서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 시대악기 연주의 가치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풀어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쇼팽은 쇼팽 시대 피아노로 연주하고 감상해야 하나요? 그게 더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나저나 우리가 정말 ‘원전’ 그대로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쇼팽이 활동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의 음악을 (재)생산, 소비하고 있는 ‘지금’, 쇼팽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은 2018년 8월 20일 방송 이야기하며 다시 나누기로 하죠.)

제1회 대회 우승의 영광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마스 리터(Tomasz Ritter)에게 돌아갔습니다. 콩쿠르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지만 잡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심사위원단과 결승 진출자의 성비(性比) 불균형부터 (적어도 온라인 상에서는) 호평 일색이었던 루마니아 참가자 아우렐리아 비소반(Aurelia Vișovan)의 결승 진출 좌절에 대한 대중의 불만까지.

하지만 정작 제 관심을 끈 사람은 (공동) 2위를 수상한 일본의 피아니스트 가와구치 나루히코(川口成彦). 사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HIP의 역사가 깊고 저변도 넓습니다. 대회 요강을 보면 반드시 19세기 피아노로 연주한 영상을 보내도록 규정하고 있죠. 그래서 19세기 피아노가 없으면 참가조차 쉽지 않습니다. 1라운드 참가자 30명 가운데 일본인은 네 명. 무시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지만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원전 연주, 시대악기 연주, 고음악 연주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당장 오는 6월 말에는 조르디 사발(Jordi Savall)이 동료들과 함께 내한해 고음악 연주의 진수를 보여 줄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과제라면 우리 스스로 고음악 연주자를 길러 내는 일이 되려나요.

HIP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아, 답은 제게 하지 마시고 직접 듣고 스스로에게 답해 보시기를! 제1회 대회 우승자 토마스 리터의 연주입니다.

Tomasz Ritter – Concerto in F minor, Op. 21 (final). Video by Chopin 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