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18년 6월 11일 세 번째 방송
‘우아하게’ 바로크 음악 한 곡 들으면서 시작하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G장조(BWV 1007) 중 프렐류드(Prelude). 루시아 스와츠(Lucia Swarts)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바흐 ‘덕후’를 자처하지만 고백하건대 좋아하는 곡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곡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작품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IMDb에 따르면 방금 감상한 프렐류드가 사용된 (해외) 영화, TV 드라마가 총 73편에 이른다고 합니다.1 광고까지 포함하면 수는 더 늘어날 테지요. 그러고 보니 국내 TV 광고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영상 매체를 통해 가장 쉽게, 자주 접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라는 뜻일 겁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다음 중 바흐의 프렐류드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광고는? (1) 가구, 특히 침대 광고, (2) 패스트푸드 광고, (3) 항공사 광고. 정답은? 잠깐. 이건 ‘2번 패스트푸드 광고’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문제 아닌가요. 인정합니다.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문제죠. 그런데 이게 오늘 주제라서요. 요컨대 이런 겁니다. ‘바로크 음악’하면 떠오르는 ‘우아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가요?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일단 대중 매체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겠죠. 다시 말해 바로크 음악이 소비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음악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면 음악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인가요? 물론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크 음악이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다운 본질적인, 혹은 음악 내적인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2 요는 음악의 의미를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해 읽어 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생각해 봐야 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뇨? 이를테면 이런 거죠. 패스트푸드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관계. 미국 서부의 한 유명 패스트푸드점 인근(매장內가 아니라)에서는 저녁 내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 흘러나온다고요.3 목적이 뭔지 짐작이 가시나요? 패스트푸드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패스트푸드의 고급화? 소화를 돕기 위해? 물론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 소개하려는 사례는 조금 다릅니다.
원래 패스트푸드점 인근이 저녁만 되면 불량 청소년으로 가득했는데, 클래식 음악을 틀기 시작하면서 청정구역이 되었다고 합니다.4 너무 깨끗한 길거리에 쉽게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학자들은 ‘깨진 유리창 이론’까지 동원해 가며 설명을 시도하지만 사실 패스트푸드점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불량 청소년에게는 클래식 음악이 소위 ‘쿨한’(요즘은 ‘힙한’이라고 해야 하나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노는 것도 ‘쿨/힙하지’ 않다는 것.
셉테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을 말합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을 사용한 범죄예방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5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범죄예방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성남시의 지하보도에서는 24시간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고요.6 서울시, 세종시 일부 지역에서도 시행 중이랍니다.7 이게 될까 싶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군요.
자연스레 선곡 리스트가 궁금해집니다. 어느 시대의 클래식 음악이었을까요? 시대 불문 효과가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은 한 곡 더 듣고 이어가죠. 이번에는 낭만시대 음악입니다.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 1817) 서곡.
결론만 이야기하면 바로크, 고전시대 음악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낭만시대 음악은 상대적으로 효과가 덜한 듯하더군요. 그럼 우리는 이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클래식 음악의 범죄예방 효과. 좋은 것 아닌가. 뭐가 문제인가. 문제라기 보다는 ‘고민’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선 아까 패스트푸드점의 사례는 범죄 ‘예방’이라기보다는 그 특정 장소에서의 ‘잠재적인’ 범죄를 예방했다는 것.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예방은 아니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저질러라.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 사례에 전제된 “반사회적 청소년은 클래식 음악을 싫어한다”는 가설 자체죠.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청소년 음악 교육을 포기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범죄자도 있지 않을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의 주인공 알렉스는 베토벤의 음악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좀 전에 감상한 〈도둑까치〉 서곡도 이 영화의 가장 폭력적인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웬만한 음악 애호가를 웃도는 취향과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열연한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 시리즈의 하니발 렉터 박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 988, 1741)을 들으며 차분히(?)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범죄예방이 목적이라면 일단 선곡부터 조심해야겠군요.8
클래식 음악이 범죄예방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최근 해외 음악학계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9 클래식 음악이 지식인의 전유물로, 심지어 ‘도구’로 사용되는 문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라는 다소 원론적인 질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창작물이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오늘날 어떤 음악이 주로 선곡되는지는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까지. 특히 후자의 지적은 시청률이 높은 예능이나 드라마에 광고가 몰리는 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 눈길을 끈 건 『청취의 과거』의 저자 조나단 스턴(Jonathan Sterne)의 연구 “음악의 비공격적 제지 효과”(The Non-aggressive Musical Deterrent).10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는 우리 몸을 규제하는지 잘 보여주는 이 글은 음악학자들이 우려하는 윤리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실로 다양한 음악과 소리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음악은 공간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그 공간을 점유하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겠죠. 결국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의미화 작업에 참여한다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굳이 음악 애호가를 자처하지 않더라도 음악이 우리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Theodore Gioia, “Bach at the Burger King,” Los Angeles Review of Books, 17 May 2018.↩
‘바로크’(Baroque)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일그러진 진주’ 이야기는 굳이 꺼낼 필요도 없겠지요.↩
Gioia, “Bach at the Burger King,” 2018.↩
Ibid.↩
우리나라에서도 한참 전에 소개된 바 있죠. 이윤화, “클래식음악의 범죄예방 효과,” 『웹집 아르코』, 2008?↩
최인진, “지하보도 클래식 음악방송으로 범죄예방,” 『경향신문』, 2017년 9월 18일.↩
김석모, “디자인을 입은 도시 ‘범죄 꼼짝마’,” 『조선일보』, 2016년 12월 27일.↩
농담이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이 렉터 박사의 폭력성을 낭만화하고 프랜차이즈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 연구한 다음 논문을 보세요. Carlo Cenciarelli, “Dr Lecter’s Taste for ‘Goldberg’, or: The Horror of Bach in the Hannibal Franchise,” Journal of the Royal Musical Association 137, no. 1 (2012): 107–34.↩
예컨대 작년 5월, 미국서양음악학회(American Musicological Society)의 공식 인터넷 포럼(Discussion Group)에 “(ab)uses for ‘classical music’”이라는 주제가 올라왔습니다. 비공개 그룹이라 가입 신청 후 승인 과정을 거쳐야 게시물을 볼 수 있습니다.↩
Jonathan Sterne, “The Non-aggressive Music Deterrent,” in Ubiquitous Musics: The Everyday Sounds That We Don’t Always Notice, ed. Marta García Quiñones, Anahid Kassabian, and Elena Boschi (Farnham: Ashgate, 2013), 1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