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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음악실

90. 에릭스 에센발즈의 합창 음악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0년 3월 2일 방송

역진(力盡). 며칠 전 국어사전을 뒤지다가 새로 알게 된 단어입니다. “힘이 다하여 지침”. 현장에서 분투하고 계신 분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지치기 쉬운 요즘. 비록 주 1회 30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방송을 통해 많은 음악 애호가들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저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번 주에는 라트비아의 작곡가 에릭스 에센발즈(Ēriks Ešenvalds, b. 1977)의 합창 음악 준비했습니다. 이 시간이 잠시나마 치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오늘 감상할 첫 번째 작품은 There Will Come Soft Rains (2016). “섬세하고 감미로운 서정시”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 1884–1933)의 동명 시를 가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18년 발표된 티즈데일의 시 “There Will Come Soft Rains”는 한마디로 대자연에 대한 찬가. 혹여나 제 어쭙잖은 번역이 누가 될까 싶어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전쟁(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자연은 거기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지금 상황에 읽을 시는 아니지 않냐고요? 다소 암울하게 읽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한없이 겸허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에센발즈도 이 시를 희망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다소 어두운, 혹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5~6연도 최대한 아름답게 묘사했다는데 들어 볼까요? 마리스 시르마이스(Māris Sirmais)가 지휘하는 라트비아 국립 합창단(State Choir Latvija)의 연주입니다.

There Will Come Soft Rains. Video by State Choir Latvija – Topic

2주 전 방송에서 헤이노 엘레르(Heino Eller, 1887–1970)의 음악 만나며 인구 130만의 나라 에스토니아가 훌륭한 음악가(특히 작곡가)를 많이 배출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구 200만의 인접 국가 라트비아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b. 1947)와 얼마 전 타계한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1943–2019)가 라트비아 출신이죠. 지난 1월 방송에서 만난 페테리스 바스크스(Pēteris Vasks, b. 1946)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라트비아 작곡가 중 한 명입니다.

에센발즈는 라트비아 음악원(Latvian Academy of Music) 졸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University of Cambridge)에서 수학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낯선 분들도 있겠지만 (국내에서도 자주 연주될 정도로) 합창 음악계에서는 유명한 작곡가입니다. 방금 연주한 라트비아 국립 합창단 단원으로도 활동했을 정도로 합창 음악에 정통한 작곡가죠. 한 곡 더 들어 볼까요?

역시 티즈데일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쓴 2010년 작품 Only in Sleep. 에센발즈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전에는 기교에 심취해 주로 난이도 높은 음악을 작곡했는데 Only in Sleep을 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요. 때로는 가장 단순한 음악이 가장 감동적인 음악이라는. 겨우(?) 서른 셋, 한창 멋부리고 싶을 나이에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다뇨!

노년의 화자가 꿈속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함께 뛰놀던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나이든 그 친구들도 내 꿈을 꾸고 있을지,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나 역시 어린아이일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노라면 왠지 울컥합니다. 나이듦을 배우는 요즘 더욱. 아무튼 오늘 소개하는 곡의 가사 중에서는 가장 애착이 갑니다. 작곡가가 눈을 감고 시를 떠올리며 피아노에서 즉흥 연주해 탄생한 곡이라죠. 소프라노 레이첼 암브로스 에반스(Rachel Ambrose Evans)와 스티븐 레이턴(Stephen Layton)이 지휘하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합창단(Choir of Trinity College Cambridge)이 들려 드립니다.

Ēriks Ešenvalds – Only in Sleep. Video by TrinityCollegeChoir

에센발즈는 티즈데일의 시를 가사로 지금까지 14작품을 썼다고 하니 분명 어떤 울림이 있었을 겁니다. (오늘 준비한 작품도 한 곡을 제외하면 모두 티즈데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울림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극히 사적인 것일 테니 알 수 없지만 음악으로 어느 정도 전해지는 듯해 에센발즈의 음악을 듣는 일은 늘 즐겁습니다. 이쯤되면 작정하고 티즈데일의 시를 탐독해 봐야 할 듯한데 우리말 번역본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작곡가마다 영감을 얻는 방식은 제각각입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의미의 ‘영감’을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작곡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루고 있는 합창곡처럼 가사가 있는 음악은 출발점이 가사(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일방통행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방문한 고향 집에서 저녁 식사 후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었다는 2012년 작품 Stars의 탄생 비화.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며 산책 당시 받았던 느낌을 어떻게 소리로 표현할까 고민하다 유리잔에 물을 부어 테두리를 문질렀더니 원하는 소리가 났다는, 그 다음에 티즈데일의 동명 시를 찾아 곡을 썼다는 내용입니다.

초연 당시 객석 맨 앞자리와 무대 사이에 음정을 맞춰 준비해 둔 유리잔의 물을 누군가 마시는 바람에 연주자들이 당황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는군요. 올겨울 눈도 거의 오지 않아 언제 겨울이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합창단과 유리잔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겨울 소리로 아쉬움을 달래 봅니다. 어두운 밤 언덕에서 쏟아지는 듯한 하늘의 별을 본 화자의 경험을 노래하는 티즈데일의 시와 함께 감상해 보시죠. VOCES8이 보내 드립니다.

VOCES8 – Stars. Video by Voces8VEVO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발트 3국이라고 하죠. 다소 생소한 나라들이지만 특색 있고 매력적인 음악 때문에 더욱 가 보고 싶어집니다.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지만 소위 ‘위대한’ 예술가(작곡가)의 영감에 대한 낭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음악사(예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늘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리고—혹은 그래서?!—에센발즈가 2004년 편곡한 Amazing Grace의 작품 설명을 보며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짐작해 봅니다.

작곡가가 11살 때 지금은 고인이 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1963–2012)의 노래를 처음 듣고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합니다. 라트비아 음악원 재학 시절, 언젠가 휘트니 휴스턴이 불러 줄 거라 상상하며 편곡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그 순수한 마음만큼이나 단순한 편곡입니다. 그리고 에센발즈의 작품 해설은 대개 이런 식입니다. 멋 부리지 않고 편안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울림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비단 작품 설명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겁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간혹, 아니 종종 본질(음악)보다 ‘화려한 말발’이 앞서는 경우가 있죠. 말 대신 보이는 곳, 보이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힘써 주시는 분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에센발즈가 편곡한 Amazing Grace, 방송에 사용된 소프라노 안나 카발리에로(Anna Cavaliero)와 스티븐 레이턴이 지휘하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합창단의 연주 음원은 YouTube에 제공되지 않아 마리스 시르마이스가 지휘하는 카메르 합창단(Kamēr Choir)의 연주 대신 보내 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평안한 한 주 되시길!

Amazing Grace (Arr. E. Ešenvalds). Video by Kamēr Choir –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