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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음악실

92. 플로런스 프라이스의 흑인 영가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0년 3월 16일 방송

매년 어느 날이 다가오면 풍겨오는 냄새, 느껴지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의미있는 날이 있겠지만 제게는 3월 1일이 그렇습니다. 아, 제가 특별히 애국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초등학교 입학 후 (군대 2년 제외하면) 벌써 30년 넘게 학교에 몸담고 있다 보니 3월 1일 즈음해서 봄과 개강이 떠오릅니다. 물론 이번 봄은 좀 다르지만.1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가 꼭 10년을 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정도는 살았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인 제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매년 7월 4일이 그랬죠. 미국의 독립기념일. 하지만 요맘때 주로 아스펜음악제·음악학교(Aspen Music Festival and School)에 참석했던 제게 이 날은 ‘한여름 밤의 음악회’를 의미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기억하며 지나가는 때가 더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2월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또는 African-American History Month)을 기념합니다. 놀라운 건 하루 이틀 반짝 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 한 달 내내 크고 작은 이벤트가 이어져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잊을 수가 없다는 것. 1월 셋째 주면 봄 학기가 시작되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는 그래서 (아직도) 1~2월이 되면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68)이나 흑인 역사의 달 행사 등이 기억납니다.2 미국인은 아니지만 아마도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겠지요.

하나 더. 매년 3월 기념하는 ‘여성 역사의 달’(Women’s History Month).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여성 주간을 갖기도 하지만 아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음악 허물기’ 시간에 ‘여성 작곡가 특집’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여성 작곡가’라는 표현이 갖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낯선 외국어 이름 때문에 모르고 지나가는 것—예컨대 ‘이 작곡가가 여자였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는 당연히 남성’이라는 전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죠.3 서론이 길었습니다. 각설하고.

올해도 2월, 그리고 3월을 거치면서 떠오른 작곡가가 한 명 있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 작곡가 플로런스 프라이스(Florence Beatrice Smith Price, 1887–1953). 아프리카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주류 교향악단(시카고교향악단)이 작품을 연주한 미국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일품입니다. 마침 지난 두 달 새 귀한 음반들이 쏟아져 나와 준비했으니 함께 감상해 보시죠.

1940년대 작곡한 Clouds. ‘구름’은 문학적으로 자유를 상징한다고 하죠. 모양도 가지각색,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제목만큼이나 음악에도 온갖 스타일이 한데 담겨 있습니다. 일감은 프랑스 인상파 음악. 하지만 듣다 보면 또 어떤 부분은 (후기) 낭만 음악을 연상케 합니다. 본인이 처한 현실과는 달리 다양한 아이디어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라이스가 꿈꾸는 세상을 담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플로런스 프라이스의 Clouds라라 다운즈(Lara Downes)의 피아노 연주로 들어 보시죠.

Clouds. Video by Lara Downes

아프리카계라는 이유로, 또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어야 했을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프라이스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중반만 해도—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이 발을 딛기 유독 어려운 대표적인 두 분야가 작곡과 지휘였으니까요. 흥미로운 점은 프라이스가 미국 안에서도 제법 보수적인 도시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 뉴잉글랜드음악원은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학생으로 받아 주는 몇 안 되는 음악 학교였다는군요. 그마저도 어머니의 권유로 멕시코계라고 속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앞서 감상한 Clouds처럼 예쁜 곡도 있지만 또 그런 한이 담겨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Fantasie nègre No. 4 (ca. 1932). 흑인 영가(negro spirituals) 기반의 환상곡 네 곡 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5음계 선율 때문에 우리 귀에도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4 4번 환상곡은 네 가지 버전의 자필 악보가 존재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어느 하나가 ‘정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군요. 그래서 라라 다운즈의 연주도 네 가지 버전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절충해 해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들어 보죠. 플로런스 프라이스의 Fantasie nègre No. 4.

Fantasie nègre No. 4. Video by Lara Downes

오늘날 프라이스는 ‘흑인 환상곡’이라는 기악 장르를 개척한 작곡가로 재평가 받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1974년 프라이스의 딸 플로런스 프라이스 로빈슨(Florence Price Robinson)이 어머니가 남긴 악보, 편지 등의 유품을 미국 아칸소대학(University of Arkansas)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아카이브 작업 후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가 2009년 작곡가의 여름 별장에서 악보가 대량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죠.5 불과 2년 전에는 아칸소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Er-Gene Kahng이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송에 선곡하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함께 듣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도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6 라이언 코커햄(Ryan Cockerham)이 지휘하는 야나체크관현악단(Janáček Philharmonic Orchestra)이 함께합니다.

Violin Concerto No. 1 in D Major: II. Andante. Video by Er-Gene Kahng – Topic

한국(계) 음악가가 이런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늘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방송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음악가들(특히 여성)이 유독 플로런스 프라이스의 음악을 자주 연주, 녹음하더군요. 아마도 동양인으로서 해외에 살며 경험한 것들이 프라이스의 음악과 공명한 것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오늘날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 중 하나. 최근 코로나 사태로 해외 거주 중인 한국인, 더 나아가 (한국계)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보고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곡 더 듣지요.

1940년대 초 작품 Your Hands in Mine. 프라이스의 음악(제목)처럼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라라 다운즈의 연주를 준비했는데 유튜브에는 (아직) 영상/음원이 없군요. (내일 방송에서는 들으실 수 있으니 본방 사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시간 관계상 방송에 넣지 못한 곡으로 대신하겠습니다. Sketches in Sepia.

Sketches in Sepia. Video by Lara Downes

다시 프라이스의 재발견 이야기로 돌아와서. 긴 얘기 짧게 하면 2018년 미국의 권위 있는 출판사 G. Schirmer가 프라이스 음악에 대한 판권을 인수했습니다.7 그래서 오늘 감상하는 작품들은 전부 2018년 이후 처음 출판, 녹음된 것. 덕분에 On a Quiet Lake 같은 곡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잔잔한 호수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성격 소품. 라라 다운즈의 연주로 감상해 보시죠.

On a Quiet Lake. Video by Lara Downes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의 평안이 필요한 요즘. 마지막으로 보내 드릴 곡은 Meditation (ca. 1929)입니다. 다만 ‘명상’하면 흔히 떠오르는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같은 곡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곡가 유희열의 〈공원에서〉(2008)가 연상되는 짧고 경쾌한 곡. 예년보다 2주 늦어지긴 했지만 3월 16일 본격적인 ‘개강’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플로런스 프라이스의 Meditation 나누며 마치겠습니다. 라라 다운즈의 연주입니다.

Meditation. Video by Lara Downes

  1. 인생을 학기 단위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전에 서술한 바 있습니다.

  2.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 ‘마틴 루터 킹의 날’은 연방(법정) 공휴일로 제정되어 있습니다.

  3. 이에 대한 자세한—그리고 학술적인—논의는 다음 글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Suzanne G. Cusick, “Feminist Theory, Music Theory, and the Mind/Body Problem,” Perspectives of New Music 32 no. 1 (1994): 8–27; “Gender, Musicology, and Feminism,” in Rethinking Music, edited by Nicholas Cook and Mark Everis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471–98; Susan McClary, Feminine Endings: Music, Gender, and Sexualit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Cusick과 McClary 모두 제가 존경하는 학자들이지만 저는 Cusick의 부드러운—하지만 힘 있는—논조를 좋아합니다. McClary의 책은 우리말로 번역도 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길…이라고 적고 보니 절판되었군요.

  4. 1번 환상곡은 특히 유명한 흑인 영가 “Sinner, Please Don’t Let This Harvest Pass”를 주선율로 사용해 귀에 더 잘 들어옵니다.

  5. Alex Ross, “The Rediscovery of Florence Price,” The New Yorker, January 29, 2018.

  6. Michael Cooper, “A Rediscovered African-American Female Composer Gets a Publisher,” The New York Times, November 15, 2018; Micaela Baranello, “Welcoming a Black Female Composer Into the Canon. Finally,” The New York Times, February 9, 2018.

  7. Cooper, “A Rediscovered African-American Female Composer Gets a Publis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