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0년 3월 23일 93번째 방송
책도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목은 『아무튼, 개강』. 물론 정말로 쓰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개강 첫 주, ‘그럭저럭 넘겼다’ 정도 담고 있는 소회일 겁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실시간 화상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반응을 살피기 어렵다는 것.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인간관계의 묘미랄까요. 그런 것은 아직 거기에 없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음악회가 줄취소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 없이 연주를 이어 가는 음악가들도 어쩌면 비슷한 심정일 겁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한 음악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1
텅 빈 쾰른 필하모닉홀. 실제 연주회처럼 은은히 비추는 조명은 이 홀을 어쩐지 불친절하고 다소 울적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관객을 위해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 . . 텅 빈 홀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다. 그저 빈 건물일 뿐이다. 기침하는 관객 앞에서 연주할 때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고요함은 어딘지 공허하게 다가온다.
쾰른 필하모닉(Gürzenich-Orchester Köln)의 수석 첼리스트 울리케 쉐퍼(Ulrike Schäfer)가 노먼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의 Slipped Disc를 통해 전한 감상입니다. 쉐퍼는 이 특별한 경험을 ‘유령 음악회’(ghost-concerts)라고 부르더군요. 최근 서울시향 온라인 콘서트 ‘영웅’ 라이브 스트리밍을 보신 분들이라면 쉐퍼가 말하는 ‘어색함’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시향의 공연 장소는 연습실. 단원들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곳입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의 지휘로 진행된 베를린 필하모닉의 무관객 콘서트(베리오+바르토크)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공연 장소는 무려 베를린 필하모닉홀. 복장도 제대로입니다. 실제 음악회을 방불케 하는 엄숙함 때문인지 연주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공연 끝에 찾아오는 어색함이라뇨. 이를 두고 관객 없이 열리는 온라인 음악회의 가능성을 엿봤다는 의견도 있었던 반면,2 밀려오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역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경험하는 게 음악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3 이번 학기 강의하는 〈음악문화연구〉 수업의 토론 주제로 손색이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정대로 내한해 팬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음악가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Valentina Lisitsa, b. 1973). 22일 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템페스트’, ‘열정’,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선사했습니다.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믿고 “위기 속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는 리시차. 혹시 가고 싶었는데 못 가신 분들에게 그 ‘희망’ 대신 전해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리시차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93)의 숨은 명곡들.
일단 한 곡 듣죠. 1878년 작곡한 〈어린이를 위한 앨범〉(Album for the Young), Op. 39.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56)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Album für die Jugend, 1848), Op. 68이 떠오르신다면 맞습니다. 부제는 ‘슈만에 따른 24개의 소품’(24 simple pieces à la Schumann). 가장 아끼던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Vladimir Davydov)에게 헌정된 작품입니다.
1번 ‘아침 기도’(Morning Prayer)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소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곡. 태교 음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와 훌륭한 대조를 이루는 2번 ‘겨울 아침’(Winter Morning)을 듣고 나면 다시 차분한 분위기의 3번 ‘어머니’(Mama)를 들려줍니다. 악보, 음반에 따라 3번 ‘목마놀이’(Playing Hobby-Horses), 4번 ‘어머니’로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작곡가의 자필 악보 순서에 따르면 ‘어머니’가 세 번째라는군요.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입니다.
리시차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작품 전집 앨범은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2019년 3월에 발매되었습니다. 지난 1월 〈음악 허물기〉 시간에도 소개한 바 있죠. 총 10장의 CD에 224개 트랙, 11시간의 음악이 담겨 있으니 실로 방대한 분량입니다. 2002년 출판된 The Tchaikovsky Handbook (TH) 작품 목록에 따르면 피아노곡은 TH. 119–151로 총 33작품. 그 외에 발레, 오페라의 피아노 트랜스크립션(transcriptions)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곡을 2017년 12월부터 2018년 4월 사이에 녹음했다는 사실. 전문 연주자가 아닌 저로서는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쩌다 한 번씩 〈음악 허물기〉 원고 2주치를 한 번에 준비해야 할 때가 있는데 분량을 떠나 내용이 다른 두 편의 글을 동시에 작업하노라면 머리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이 많은 작품을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 소화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덕분에 친숙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낯선 피아노 작품들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열심히 듣는 수밖에요.
이를테면 1871~72년 작곡한 〈2개의 소품〉(Morceaux), Op. 10.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던 차이코프스키가 겨울 방학을 맞아 프랑스 니스에 머무는 3주 동안 완성한 곡입니다. 1번 ‘녹턴’(Nocturne)과 2번 ‘유머레스크’(Humoresque) 모두 제목 그대로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녹턴’은 취향 저격이라는 고백만 남깁니다.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로 들려 드립니다.
차이코프스키는 53세의 나이로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6번 교향곡 ‘비창’ 초연을 지휘한 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이야기는 유명하죠. ‘비창’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피아노곡도 있습니다. 〈18개의 소품〉, Op. 72 중 17번 ‘먼 과거’(Passé lointain).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난 1893년 완성한 마지막 피아노 작품입니다. 18곡 전부 연주하면 60~70분에 육박하는 대곡이죠. 그해 2~3월 ‘비창’ 스케치를 완성한 후 4월 한 달 만에 완성한 건 함정입니다.
자필 악보에 기록된 제목은 ‘먼 과거의 소리’(Echo d’un passé lontain). ‘먼 과거’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작품 전체 맥락과 이 곡의 (다소 전통적인) 음악 어법을 고려하건대 선배 작곡가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로 보내 드립니다.
코로나19로 취소되고 있는 게 비단 음악회뿐만은 아닙니다. 자칫 절망하기 쉬운 어려운 시기에 내한해 희망을 안겨 준 발렌티나 리시차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오늘, 리시차와 함께 그곳에 계셨던 분들이 전할 또 다른 희망을 떠올리면 월요일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군요.
마지막으로 두 곡 준비했습니다. 〈3개의 소품〉, Op. 9, TH 131 중 2번 ‘살롱 폴카’(Polka de salon). 그리고 앞서 만난 〈어린이를 위한 앨범〉 가운데 21번 ‘달콤한 꿈’(Sweet Dream). 전자는 경쾌+발랄, 후자는 제목 그대로 ‘달콤’하고 차분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기분에 따라 골라 들으시면 어떨까요. 아, 물론 어느 쪽을 선택하셔도 명곡, 명연주. 두 곡 모두 감상하시는 것도 좋겠네요.
Ulrike Schäfer, “What It’s Like, Playing to an Empty Hall,” Slipped Disc, by Norman Lebrecht, March 14, 2020.↩
Anthony Tommasini, “In a Pandemic, Musicians Play in Empty Halls for Audiences Online,” The New York Times, March 13, 2020.↩
Alex Ross, “Coronavirus Concerts: The Music World Contends with the Pandemic,” The New Yorker, March 14,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