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KBS 음악실

94. ‘피아노의 발키리’ 테레사 카레뇨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0년 3월 30일 방송

제 연주가 이 공포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작은 몸짓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음악과 예술은 우리를 단결시키고, 정신을 고양시키기 때문이죠.

강경루, “코로나 뚫고 한국 온 리시차, 1000명의 박수가 쏟아지다,” 『국민일보』, 2020년 3월 22일.

〈KBS 음악실〉의 하지숙 작가가 지난주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오프닝에 인용한 발렌티나 리시차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연주, 더 나아가 음악이 질병을 극복하는 데 (적어도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는 게 인간이라는 데에. 예술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뇨.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의 전언에 따르면 ‘역사에 남을’ 만한 연주회였다죠. ‘강력한 타건’과 ‘화려한 기술’로 대표되는 ‘피아노의 검투사’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았다는 연주평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코로나19가 만들어 낸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이를 통해 ‘음악하기’(musicking)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1

오늘의 주인공도 리시차 못지않은 강렬한 연주 스타일로 기억되고 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노의 발키리’(Valkyrie of the piano). 베네수엘라의 피아니스트 테레사 카레뇨(Teresa Carreño, 1853–1917)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음반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 세상을 떠난 카레뇨의 연주 음반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다행히 1905년 제작한 벨테-미뇽 피아노 롤(Welte-Mignon piano roll)을 사용해 1923년 녹음한 자동 피아노(player piano) 음반이 남아 있습니다. 잠시 듣고 가죠.

Ballade No. 1 in G Minor, Op. 23 (Welte-Mignon piano roll recording). Video by Teresa Carreño – Topic

1917년 세상을 떠나 일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카레뇨가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즘 같은 시기에 듣기 좋은 예쁜 곡들로 준비했습니다. 그 안에서 또 누군가 한 줄기 희망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첫 곡은 만 15세가 되는 1868년 작곡한 〈〉(Le printemps), Op. 25. 평생 작곡한 75편의 작품 가운데 68편이 피아노 독주곡입니다. 놀라운 건 이 곡들 대부분 1875년 이전 작품이라는 사실. 카레뇨가 1853년생이니까 만 22세 이전 작품이라는 뜻이 되겠네요. 코로나19 때문에 봄기운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요즘, 음악 들으며 봄 향기 맡아 보시길 바랍니다. 테레사 카레뇨의 〈봄〉. 클라라 로드리게즈(Clara Rodriguez)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Le printemps, Op. 25. Video by Clara Rodriguez – Topic

자필 악보 기준으로 확인된 첫 작품은 1860년, 만 7세 때 작곡했습니다. 이 시기의 곡들은 물론 출판되지 않았지만 Op. 1이 만 10세가 되는 1863년 출판되었으니 여전히 어린 나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셈입니다. 여성이 활동하기 쉽지 않았던 19세기 말이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죠. 더군다나 카레뇨는 베네수엘라 내전으로 1862년, 만 9세 때 미국(뉴욕)으로 망명했습니다. ‘남미 출신’ 음악가, 그것도 여성으로서 타국에 도착하자마자 인정받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 시기 음악은 분명 어린 아이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순수하고 예쁩니다. 한 곡 들어 볼까요? Op. 1이 출판된 1863년 작품 〈눈물〉(Une larme), Op. 5. 혹시 무소륵스키의 동명 피아노곡을 떠올리셨다면 축 처지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2 만 9세 아이의 마음으로 표현한 ‘눈물’답게 그저 예쁘니까요. 알렉산드라 욀러(Alexandra Oehler)의 연주입니다.

Une larme, Op. 5. Video by Alexandra Oehler – Topic

카레뇨가 20대 이후에 작곡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30~40대에도 손에 꼽을 정도지만 작곡을 했죠. 여성으로서 작곡가 경력을 이어 가기 쉽지 않은 시대였던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때문에 작품 활동을 중단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카레뇨가 5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다는 점, 몇 차례 안 되지만 성악가(메조소프라노)로서 오페라 무대 위에 올라 노래하고 심지어 지휘를 한 적도 있다는 점, 베네수엘라에서 잠시나마 오페라단을 운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곡할 시간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굉장히 바빴습니다.

또 카레뇨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지도한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Louis Moreau Gottschalk, 1829–1869), 쇼팽의 제자로 유명한 조르쥬 마티아스(Georges Mathias, 1826–1910), 러시아의 거장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 같은 대가들이 뒤에 있었으니 여건만 된다면 작곡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토록 화려한 경력임에도 1872년 작품 〈틀린 음〉(La fausse note) 같은 작품을 듣고 있으면 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게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제목의 ‘틀린 음’은 화음에 속하지 않는 화성 밖의 음, 즉 ‘비화성음’(nonchord tone)을 말합니다. 쇼팽 〈연습곡〉, Op. 25, No. 5 생각하시면 빠르겠군요. 지난주에 만난 리시차의 연주로 잠시 감상해 보시죠.

Chopin: 12 Etudes, Op.25 – No.5 In E Minor. Video by Valentina Lisitsa – Topic

비화성음은 기본적으로 장식적인(embellishing) 음인데 카레뇨의 곡에서는 굉장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나와 있는 몇 안 되는 카레뇨 음반을 전부 들어 본 입장에서 이야기하건대 작곡가로서의 기질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Op. 39. 작품 번호가 붙은 카레뇨의 마지막 곡이지만 겨우 만 19세가 되는 해 작곡. 계속했다면 어떤 훌륭한 음악이 탄생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재기 발랄한 곡입니다. 클라라 로드리게즈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La fausse note, Op. 39. Video by Clara Rodriguez – Topic

카레뇨의 재능은 1869년 작품 〈꿈속의 무도회〉(Un bal en rêve), Op. 26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짧은 서주 후 등장하는 첫 주제의 도입부(00:43–00:54)가 생일 축하 노래(“Happy Birthday to You”)와 매우 흡사합니다.3 참고로 생일 축하 노래를 닮은 첫 주제의 표제는 ‘잠’(le sommeil). (일단 잠을 자야 꿈을 꿀 테니까요.) ‘꿈’(le rêve) 주제가 이어지고 곡이 끝날 때까지 두 주제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네 마디 뿐이라 훅하고 지나가지만 몇 차례 더 반복되니 놓칠 걱정은 없습니다. 혹시 오늘 생일 맞는 분 있다면 이 곡으로 축하를 대신하는 것도 좋겠군요. 클라라 로드리게즈의 연주로 감상하겠습니다.

Un bal en rêve, Op. 26. Video by Clara Rodriguez – Topic

들으면 어쩐지 기분 좋아지는 음악들입니다. 오늘은 힘내시라고 일부러 그런 곡들 위주로 선곡했지만 10대 아이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작품도 있습니다. 지금 선곡하기에는 다소 무거울 수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또 만날 시간이 있을 겁니다. 건강한 한 주 되시길!


  1. Christopher Small, Musicking: The Meanings of Performing and Listening (Middletown, CT: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8). 이 책의 번역서는 아니지만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최유준 교수의 다음 저서를 추천합니다. 최유준, 『크리스토퍼 스몰, 음악하기』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2. 무소륵스키의 〈눈물〉이 1880년 작품—1886년 출판—이니 카레뇨의 〈눈물〉이 한참 먼저 작곡된 곡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빠릅니다.

  3. 물론 두 곡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사족입니다만 혹시 어렸을 때부터 듣고 부른 생일 축하 노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그리고 오랫동안 누군가 이 노래의 저작권료를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Happy Birthday to You”의 원곡이 1893년 발표된 “Good Morning to All”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법적으로 ‘public domain’ 판결이 난 건 불과 2016년의 일입니다. 오늘 자세히 다룰 내용은 아니지만 간단한 내막은 다음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박지원, “생일 축하 노래에도 저작권이 있나요?,” 『저작권 문화』, Vol. 255, 2015년 11월 (진주: 한국저작권위원회, 2015),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