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브루흐의 실내악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7월 5일 160번째 방송

코로나19와 베토벤 탄생 250주년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묻히고 지나갔지만 2020년 서거 100주년을 맞은 음악가가 있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 〈바이올린 협주곡 1번〉(Violin Concerto No. 1, Op. 26, 1867)이나 〈스코틀랜드 환상곡〉(Scottish Fantasy, Op. 46, 1880)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몇 곡 안 되지만 브루흐는 100여 곡을 남긴 작곡가입니다. 자주 연주되지 않는 〈바이올린 협주곡〉 Op. 44와 Op. 58을 비롯해 주옥같은 작품이 수두룩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내밀한 실내악 준비했습니다. 모두 느린 악장이라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정통 후기낭만음악 만날 수 있습니다.

막스 브루흐. Credit: Wikimedia Commons

첫 곡은 〈현악4중주 1번〉, C단조, Op. 9 중 2악장 Adagio. 실내악은 10여 작품 밖에 쓰지 않았지만 브루흐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작품들입니다. 1856년 작곡한 〈현악4중주 1번〉은 18세 ‘소년’ 브루흐의 감성을 엿들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커리어 초기에는 실내악과 성악곡을 주로 작곡했는데 10대 소년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밀도 높은 음악입니다. 만하임 현악사중주단(Mannheimer Streichquartett)의 연주로 감상하시죠.

String Quartet No. 1 in C Minor, Op. 9: II. Adagio. Video by Mannheimer Streichquartett – Topic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게 10대 소년의 작품답지 않나요? 브루흐는 80세가 되는 1918년 다수의 실내악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에만 두 개의 〈현악5중주〉를 완성하고 이듬해 세 번째 〈현악5중주〉 작곡을 시작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 하고 1년 후 다른 작품으로 재작곡합니다. 어떤 작품인지는 잠시 후 만나기로 하고. 1918년 완성한 두 개의 〈현악5중주〉 중 A단조 3악장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3악장의 선율은 1906년 발표한 자신의 〈관현악 모음곡 2번〉(Suite No. 2)과 1915년 작품 〈스웨덴 민요에 의한 세레나데〉(Serenade nach schwedischen Melodien)에 사용된 선율을 재활용한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에서 반복되는 자기 인용이지만 현악오중주의 내밀함이 주는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현악5중주 A단조〉는 브루흐 생전 연주, 출판된 기록이 없고 자필 악보가 작곡가 사후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1937년 영국 BBC 방송 중계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습니다.1 음악회에서 ‘연주’된 것이 아니라 방송으로 ‘송출’된 연주였기 때문에 ‘초연’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공영방송의 클래식 음악 전문 채널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군요. 브루흐의 〈현악5중주 A단조〉, Op. posth. 중 3악장 Adagio non troppo. 울프 횔셔 앙상블(Ensemble Ulf Hoelscher)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String Quintet in A Minor: III. Adagio non troppo. Video by Ulf Hoelscher – Topic

브루흐의 현악사중주와 현악오중주 들어봤는데 어떤가요? 저는 두 곡 듣고 나니 다음 작품, 그의 〈현악8중주〉가 더욱 기대됩니다. 멘델스존 〈현악8중주〉, Op. 20 (1825) 탄생 이래 작곡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편성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는 물론 한때 작곡을 전공했던 음악학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멘델스존, 브람스의 전통을 계승한 브루흐라면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현악8중주〉, B$\flat$장조는 브루흐가 세상을 떠난 1920년 완성된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919년 1월, 세 번째 〈현악5중주〉를 쓰기 시작했지만 이 시기는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직후였습니다. 패전국 독일 국민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시기였을 텐데 브루흐는 아내의 죽음까지 경험하며 작곡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2 마음을 추스르고 1920년에 재개, 〈현악8중주〉로 방향을 틀어 완성한 곡입니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장중하게 시작해 다소 희망적으로 끝나는 이 악장에서 브루흐의 심경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브루흐 현악 작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악8중주〉, B$\flat$장조, Op. posth. 중 2악장 Adagio. 울프 횔셔 앙상블의 연주로 들어보시죠.

String Octet in B-Flat Major: II. Adagio. Video by Ulf Hoelscher – Topic

마지막 곡은 〈피아노5중주〉입니다. 너무 현악 작품만 감상하는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피아노5중주 G단조〉는 1888년에 완성했지만 정확히 100년 후 1988년이 되어서야 출판된 작품입니다. 브루흐가 자필 악보에 1886년으로 (잘 못) 기록하는 바람에 1886년 작품으로 (잘 못) 알려져 있지만 이 곡을 헌정받은 앤드류 커츠(Andrew G. Kurtz)와 주고받은 서신을 토대로 1888년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3

브루흐는 지휘자로서도 굉장히 성공한 작곡가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음악 커리어 대부분을 지휘자로 보냈습니다. 수많은 교향악단을 거쳐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있던 40대에는 영국 리버풀 교향악단(Liverpool Philharmonic Society)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1880–83년의 일입니다.4 〈피아노5중주〉는 교향악단 이사장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였던 앤드류 커츠에게 헌정된 작품입니다. 브루흐가 가장 잘나가던 시기라 너무 바쁜 나머지 약속 후 7년이 지난 1888년에서야 완성했지만 2년 후 커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사라진 작품입니다.5 2악장은 아마추어 연주자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단순한 악장이지만 음악이 주는 감동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악장은 연주하기 녹록지 않아요.) 브루흐의 〈피아노5중주 G단조〉, Op. posth. 중 2악장 Adagio. 울프 횔셔 앙상블의 연주입니다.

Piano Quintet in G Minor: II. Adagio. Video by Ulf Hoelscher – Topic

오늘날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기억되고 있는 브루흐의 실내악 함께 들어봤습니다. 실내악 음악회 프로그램 한 자리를 차지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셨나요? 아직 잘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한 주 더 준비했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브루흐의 다른 작품들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 주도 잊지 마시길. 마지막으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 26, 3악장 Finale (Allegro energico). 정경화의 경쾌한 연주로 보내드립니다.

Bruch: Violin Concerto No.1 in G minor, Op.26 – 3. Finale (Allegro energico). Video by Kyung Wha Chung – Topic

  1. Tully Potter, Liner notes for Bruch: String Quintets & Octet, The Nash Ensemble (Hyperion CDA68168, 2017), 5–6.

  2. Potter, Liner notes for Bruch: String Quintets & Octet, 5.

  3. Tully Potter, Liner notes for Bruch: Piano Quintet & Other Works, Goldner String Quartet and Piers Lane (Hyperion CDA68120, 2016), 6.

  4. 현재 바실리 페트렌코(Vasily Petrenko)가 상임 지휘자로 있는 왕립 리버풀 교향악단(Royal Liverpool Philharmonic)의 전신입니다.

  5. Potter, Liner notes for Bruch: Piano Quintet & Other Works,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