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M. 포스터와 음악

대만의 음악학자 충한 차이(Tsung-Han Tsai)의 신간 『E. M. 포스터와 음악』은 험프리 제닝스(Humphrey Jennings, 1907–1950)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티모시를 위한 일기》(A Diary for Timothy, 1945)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1 라디오 뉴스를 틀어 놓고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잠시 후 ‘열정’(Appassionata)이라는 부제로 친숙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F단조, Op. 57의 1악장이 흘러나옵니다. 음악회 프로그램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영국의 피아니스트 마이러 헤스(Myra Hess, 1890–1965)의 연주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너무 똑같이 생겨 놀랐는데 영화 크레딧을 확인해 보니 정말 헤스 본인입니다. 잠시 감상하시죠. 차이의 논의가 시작되는 8분 30초부터 재생됩니다.

Diary For Timothy. Video by Nuclear Vault

1944년 영국. 아나운서가 독일군과 교전 중인 영국군의 상황을 상세히 전합니다. 고립된 상태에서 물 없이 지낸지 3일째가 되어 가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비가 내려 살았다는 등. 위기에 처한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영국군은 강하다며 애국심을 고양시킵니다. 곧이어 연주회장으로 화면이 전환되고 헤스의 연주를 감상하는 청중의 모습이 잡힙니다. 잠시 음악만 흐르다 곧 내레이션이 시작됩니다. 1944년 9월 전쟁 중 태어난 티모시를 위해 쓰는 일기의 한 구절입니다. 뉘앙스를 살릴 자신이 없어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One-third of all our houses have been damaged by enemy action. They do like the music that lady was playing. Some of us think it is the greatest music in the world. Yet it’s German music, and we are fighting the Germans. There’s something you will have to think over later on.

A Diary for Timothy, 1945

‘우리 중 누군가’는 베토벤의 음악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와 그렇지 않은(혹은 그럴 수 없는) ‘우리’는 (독일과)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와 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로 구분됩니다. ‘티모시’로 상징되는 전후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선전 영화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두 세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됩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가치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음악이 사용되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독일과 “전쟁 중인 영국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데 베토벤의 음악을 사용했다는 사실”(4)에 주목하는 차이의 글은 음악학자 윌리엄 청(William Cheng)의 표현을 빌자면 음악이 ‘그냥 음악’(just music)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

차이에 의하면 이 다큐의 내레이션을 영국의 작가 E. M. 포스터(E. M. Forster, 1879–1970)가 썼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3 포스터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별 주목을 받지 못 했다고요. 포스터는 『하워즈 엔드』(Howards End, 1910)의 베토벤 교향곡 5번 묘사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 감독의 영화 《하워즈 엔드》(1992)로 소설을 대신한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영화에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고블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포스터는 헬렌의 입을 빌어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합니다.

Why a goblin? Video by DravenCookie

차이의 『E. M. 포스터와 음악』은 포스터가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의 “정치적 의의”(political significance)를 연구한 책입니다.4 포스터 산문의 문학성이나 “음악성”(musicality)을 주로 논하는 기존 연구와는 달리 “음악과 정치학 사이의 논쟁적 관계에 대한 그[포스터]의 의식”(4)에 집중하는 차이의 저서는 문학과 음악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저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E. M. 포스터, 1947년 하버드대 심포지엄 강연에서

포스터가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장편 데뷔작 『천사들도 발 딛기 두려워하는 곳』(Where Angels Fear to Tread, 1905)에 묘사된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1835)는 19세기 당시 오페라 공연장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냅니다. 하지만 음악학자의 관점에서 보는 포스터의 음악적 묘사는 그가 혹시 음악학 전공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하워즈 엔드』의 베토벤 교향곡 5번 4악장의 묘사는 음악학자 스콧 버넘(Scott Burnham)이 지적한 대로 19세기 음악 형식(특히 소나타 형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쓴 것처럼 읽힙니다.5

물론 포스터가 이러한 묘사를 하는 데 모교의 음악학자 에드워드 덴트(Edward Dent, 1876–1957)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이게 단순히 도움 받는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6 어쨌거나 포스터와 음악의 관계를 다룬 연구는 많지만 기존 연구가 ‘포스터는 근대적 작가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음악에 주목한 것이라면 차이의 책은 이러한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한계란 “음악을 순수하게 미학적이고 개념적인 존재”(10)로 단순화한다는 것. 하지만 《티모시를 위한 일기》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음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지요. 바꿔 말하면 음악은 포스터에게 미학적 유희의 대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불어 포스터는 이집트와 인도에 거주하며 글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곳에도 ‘음악’이 있었겠죠. 하지만 우리가 흔히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르는 유럽 음악, 서양 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접했을 겁니다. 그래서 차이는 포스터가 다양한 ‘음악들’(musics)을 접한 작가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7 요컨대 음악이 포스터 작품에 미친 ‘형식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논의하는 것은 ‘음악’을 좁은 의미로 단순화했기 때문이라는 것.8 그런 점에서 “‘가장 음악적인 소설가’의 음악적 정치학에 관한 학술서 수준의 연구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동시에 흥미롭다”(11)는 게 차이의 설명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요? 흥미롭게도 차이는 포스터가 제안한 ‘듣지 않기’(not listening)를 방법론으로 제시합니다.9 ‘듣지 않기’라뇨? 음악은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요? ‘듣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테고, 우리 생각과는 달리 그 의미와 방식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했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자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긴 얘기 짧게 하면 ‘음악’에만 집중하는 근시안적인 ‘듣기’는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배제하는 행위라는 것.10 2021년 출판된 책에서 아직도 이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음악학계가 아직도 굉장히 편협한 방식으로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는 방증 아닌가 싶습니다. 동시에 음악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서로 존중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어쨌든 차이는 ‘듣지 않기’를 통해 『하워즈 엔드』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브람스 가곡에 관한 티비와 헬렌의 대화에 주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먼 티비가 브람스 가곡을 부르는 여성들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는 겁니다.11 그리고 이 대화는 헬렌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예컨대 여성 참정권 지지자인 헬렌이 브람스를 부르는 ‘교양 있는’ 여성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티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12 하지만 포스터가 브람스의 음악(혹은 연주나 듣기)를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주목 받지 못 했다는 게 차이의 설명입니다.

차이에게 이 대화가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언급된 브람스 가곡이 사실 남자 성악가를 위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änge, Op. 121)이기 때문입니다.13 분명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부르는 여성들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차이는 포스터가 제목이 비슷한 브람스의 다른 작품 《네 개의 노래》(Vier Gesänge), Op. 17과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 의도된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14 소설에 언급된 《네 개의 엄숙한 노래》 중 한 곡 들어볼까요? 1번곡 〈인간에게 임하는 일이〉(Denn es gehet dem Menschen). 게롤트 후버(Gerold Huber)의 피아노, 베이스 권터 그로이스뵈크(Günther Groissböck)가 노래합니다.

Brahms: Vier ernste Gesänge Op. 121 – 1. Denn es gehet dem Menschen. Video by Günther Groissböck – Topic

개인적으로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 1924)을 분석한 제2장이나 『천사들도 발 딛기 두려워하는 곳』을 다룬 제3장이 기대됩니다.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원작 소설과 비교해서 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제5장 ‘아마추어리즘, 음악학, 젠더.’ 문학계에서도 거의 주목 받지 못 한 포스터의 두 작품에 묘사된 제도권 음악학에 대한 비판과 아마추어리즘을 향한 지지가 실은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그의 떡밥이 실제로는 어떨지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문학 작품에 음악(특히 ‘클래식’ 음악)이 묘사된 사례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겁니다. 학술 논문이나 학술서를 읽는 기쁨 중 하나는 관련 분야의 핵심 문헌들을 접하게 된다는 점이지요. 일일이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차이의 책보다 조금 앞서 출판된 네이선 워델(Nathan Waddell)의 『문라이팅: 베토벤과 문학적 근대주의』도 잊고 있었는데 조만간 읽어 봐야겠습니다.15

『E. M. 포스터와 음악』의 저자 충한 차이 박사는 이번에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음악학자입니다. 저자 약력에는 ‘독립 학자’(Independant Scholar)로 소개되어 있더군요. 말 그대로 어떤 연구 기관(주로 4년제 대학)에 속하지 않고 활동하는 학자들을 말합니다. 제 장래희망(?) 같은 것이기도 한데, 생계 문제가 늘 발목을 잡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책도 읽었겠다, 독립 음악학자로 어떻게 먹고사는지 물어봐야겠군요. 돌아오는 답변이 ‘집에 재산이 많다’만 아니라면 저도 한 번 해 보려고요.

음악 감상하며 긴 글 마치겠습니다. 브람스가 1860년 작곡한 《네 개의 노래》(Vier Gesänge), Op. 17. 여성 합창단을 위한 작품입니다. 포스터가 『하워즈 엔드』에 언급하려고 했던 브람스 노래가 아닌지 차이가 의심했던 그 곡입니다. 이 가운데 1번 〈하프는 울린다〉(Es tont ein voller Harfenklang). 스테판 파크만(Stefan Parkman)이 지휘하는 덴마크국립라디오합창단(Danish National Radio Choir)이 부릅니다.

4 Gesänge, Op. 17: No. 1, Es tont ein voller Harfenklang. Video by Danish National Radio Choir – Topic

  1. Tsung-Han Tsai, E. M. Forster and Music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

  2. William Cheng, Sound Play: Video Games and the Musical Imagina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3. Tsai, E. M. Forster and Music, 4.

  4. 같은 책, 4.

  5. 버넘의 분석을 요약하면 재현부로 돌아가는 발전부 후반 딸림7화음의 7음이 탈락하면서 원조의 으뜸화음으로 ‘해결’되는 대신 딸림화음의 으뜸화(tonicized)가 일어나고, 이는 4악장 발전부 재경과구에서 3악장 주제(‘고블린’)가 재현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다는 것. Scott Burnham, “How Music Matters: Poetic Content Revisited,” in Rethinking Music, edited by Nicholas Cook and Mark Everis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06.

  6. Cormac Newark, Opera in the Novel from Balzac to Proust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1–2. 19세기 소설에는 오페라 장면이 유독 자주 등장합니다. 묘사도 꽤 자세한 편입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래서 비록 소설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료(史料)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영국 왕립음악학회에서 매년 우수한 업적을 남긴 음악학자에게 수여하는 덴트 메달(Dent Medal)은 에드워드 덴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1961년 재정되었으니 벌써 60년이 되었군요. 2021년 수상의 영예는 슈만(최근에는 오페라) 연구로 잘 알려진 음악학자 로라 턴브리지(Laura Tunbridge) 옥스퍼드대 교수에게 돌아갔습니다.

  7. Tsai, E. M. Forster and Music, 10. ‘음악들’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추천합니다. Philip V. Bohlman, “Ontologies of Music,” in Rethinking Music, edited by Nicholas Cook and Mark Everis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7–34.

  8. Tsai, E. M. Forster and Music, 10.

  9. 같은 책, 12; E. M. Forster, “Not Listening to Music” (1939), Two Cheers for Democracy, edited by Oliver Stallybrass (London: Edward Arnold, 1972), 122.

  10. Tsai, E. M. Forster and Music, 13.

  11. 같은 책, 15.

  12. 같은 책, 14.

  13. 같은 책, 15.

  14. 같은 책, 15. 지금은 여자 성악가들도 조성을 바꾸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 이게 얼마나 흔한(혹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어 차이의 초대에 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15. Nathan Waddell, Moonlighting: Beethoven and Literary Moder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