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의 피아노 소품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8월 2일 164번째 방송

오페라 《카르멘》(Carmen, 1875)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는 CD 두 장을 꽉 채울 정도로 적지 않은 피아노 소품을 남겼습니다. 피아노 트랜스크립션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겁니다. 대부분 초기작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출판된 작품이 많지 않아 주목 받기까지는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피아노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던 작곡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작품들. 저와 함께 감상해 보시죠.

Photograph of Georges Bizet by Étienne Carjat, 1875, Wikimedia Commons

오페라 《카르멘》 말고 유명한 비제의 작품을 꼽으라면 《아를의 여인 모음곡》(L’Arlésienne Suite). 관현악으로 친숙한 작품이지만 작곡가 본인이 직접 편곡한 피아노 버전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희곡 『아를의 여인』을 위해 작곡한 부수음악(incidental music)이지만 희곡이 흥행에 실패하자 연주용 모음곡으로 발표합니다. 《아를의 여인 모음곡 1번》 중 서곡에 해당하는 1번 〈전주곡〉(Prelude) 들어 볼까요? 워낙 잘 알려진 곡이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전주곡답게 다양한 음악을 담고 있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율리아 세베루스(Julia Severus)의 연주입니다.

L’arlesienne Suite No. 1 (arr. for piano) : I. Prelude. Video by Julia Severus – Topic

비제는 일찍이 영재 소리 듣던 작곡가였습니다. 20대 초반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작곡가.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수상하며 이탈리아 유학까지 하지만 귀국 후 마주한 현실은 아무도 관심 없는 작곡가. 결국 생업을 위해 피아노 레슨과 편곡을 해야 했는데, 특히 남의 작품 편곡하는 걸 정말 싫어했습니다. (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지 같은 곡’ 편곡하느라 작곡을 이틀이나 중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기도 했다는군요. 이거 어떤 기분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먹고살아야지 어쩌겠어요. 그래서 오늘 첫 곡으로 하필 피아노로 편곡된 작품을 고른 게 비제에게 미안한데, 그래도 비제 본인 편곡이니까 이해해 주겠지요?

《카르멘》 때문인지 비제하면 강렬한 춤곡이 먼저 떠오르지만 경건하고 차분한 음악도 없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1855년 작곡한 《종교적 명상》(Meditation religieuse). 당시 유행하던 잡지(Le Magasin des familles)에 실린 곡인 만큼 누구나 쉽게 연주하고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작품은 아닙니다. 율리아 세베루스의 연주로 감상하시죠.

Magasin des familles: I. Meditation religieuse. Video by Julia Severus – Topic
1875 lithographic poster for the première of Georges Bizet’s Carmen, Wikimedia Commons

사실 《카르멘》은 그냥 비제의 수많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카르멘》 초연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지금처럼 누구나 아는 음악으로 자리 잡는 모습도 보지 못 했습니다. 비제는 집시 음악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뿐더러 다양한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작곡가였습니다. 1857년 작품 《세 개의 음악적 소묘》(3 Esquisses musicales) 중 1번 〈터키풍의 론도〉(Ronde turque)가 좋은 예입니다. 피아노를 이렇게 갖고 놀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재밌고 색다른 곡입니다. 율리아 세베루스가 연주합니다.

3 Esquisses musicales: No. 1. Ronde turque. Video by Julia Severus – Topic

〈터키풍의 론도〉 같은 작품을 들어 보면 비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여러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정작 비제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군요.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도 먹고살겠다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수는 없다고 했을 정도이니 본인 콘셉트가 확실한 작곡가였습니다. 이것도 뭔지 너무나 알 것 같은데 오늘 유독 공감을 많이 하는군요. 그렇다고 비제에게 피아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작곡가의 전제 조건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했던 음악가. 《녹턴 F장조》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세 소년의 작품이지만 비제에게 작곡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는지, 《카르멘》으로만 비제를 만나는 게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알 수 있는 곡입니다. 율리아 세베루스의 연주로 감상하겠습니다.

Nocturne in F Major. Video by Julia Severus – Topic

19세기 프랑스 작곡가다운 낭만적이고 시적인 음악 아닌가요? 비제가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기도 했지만 특히 프랑스에는 문학적인 작곡가들이 많았습니다. 비제도 소위 ‘문청’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문학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1865년 작품 《라인강의 노래》(Chants du Rhin). 무언가의 형식을 취한 성격 소품입니다. 이 중에서 1번 〈여명〉(L’aurore) 감상하며 오늘 이야기 마치겠습니다. 《라인강의 노래》 나머지 곡들은 다음 주에 이어서 만날 예정이니 딴 데 가지 마시길. 율리아 세베루스의 연주입니다.

Chants du Rhin: I. L’aurore. Video by Julia Severus – Topic

How to cite this: 계희승, “비제의 피아노 소품,” 『음악학 허물기』, 2021년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