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서술

예술가의 산문이 언제나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력을 나열하고 취향을 전시하고 편견을 고집하는 글들도 많다. 그러나 일가를 이룬 장인들의 산문은 대체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지난한 숙련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경험적 통찰들이 정직하게 글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생을 헐어 쓴 글의 힘이다.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추천의 글〉 중에서

“생을 헐어” 가며 글을 써야 하나 싶지만(저는 못 합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공감합니다. 전에도 밝힌 바와 같이 음악에 관한 문학가들의 글을 챙겨 읽는 편입니다. 시, 소설, 산문 가리지 않습니다. 별 의미 없는 형용사의 나열인 경우도 있는 반면 “일가를 이룬 장인들의 산문은 대체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음악가 혹은 음악학자 이상의 통찰을 보이는 위화(余華)의 산문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文學或者音樂)은 물론 후자에 속합니다.1

작가마다 특징도 뚜렷한데 위화의 글에서는 감상자로서의 사색보다는 음악사적인 이해가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강점을 보이는 시대는 19세기. 예컨대 〈음악의 서술〉은 대학에서 ‘서양음악사’ 수업을 충실히 듣고 소화한 수준을 넘어 최소한 그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19세기 음악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전제합니다.

저는 굳이 따지면 ‘음악이론과 분석’을 전공한 음악학자입니다. 하필(?) 오페라 연구를 선택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음악사 서술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접하고 있지만 직접 서술을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1차 목적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사 서술의 문제나 한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데 19세기 ‘낭만주의 전쟁’에 대한 위화의 견해는 역사 서술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명쾌하게 집어냅니다.

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든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 다채로운 경력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와 다양한 인식에서 출발해 나름의 입장과 각양각색의 형식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똑같은 정성을 기울여 창조해왔다.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음악의 서술〉 중에서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음악 속 모든 형식의 서술을 연주할 수 있지만 (중략) 음악사의 분쟁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음악의 서술〉 마지막 문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음악학자에게 오늘도 불가능한 과제를 안깁니다.

반면 모차르트 오페라의 아리아를 비판한 베를리오즈를 두고 그건 베를리오즈가 모차르트를 오독(誤讀)한 것이라는 〈부정〉의 주장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깁니다. 오페라사에서나 논의될 법한 모차르트 오페라에 관한 논쟁은 물론이고 19세기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차지하는 위치까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닐 테니 취재를 하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위화의 글은 너무나 구체적인 동시에 자연스러워 온전히 자신의 지식과 사유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음악에 관한 위화의 산문이 호소력을 갖는 진짜 이유는 음악이 소설에 미치는 영향을 그 자신이 의식하며 서술한 글이기 때문일 겁니다. “소설가 중에도 실험 정신이 강한 사람들은 언어 서술에서 화성을 추구하며 동일한 시간대에 다채로운 서술을 시도한다”는 위화는 “음악 서술 속의 화성이 참 부럽다”며 은근한 시기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중략) 음악이 아니라 악보에 매료당했다”는 고백 또한 분명 겸손이 아닌 진심처럼 들리지만 “무지는 신비를 구성한 뒤 부름”이 된다는 말에서 간절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뜻 음악사적 지식을 늘어놓는 것처럼 읽히면서도 글의 중심을 잃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서술의 풍부함이 극에 달하면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은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얻은 통찰이지만 그 끝은 늘 자신의 문학을 향합니다. “단편소설 한 편의 구조와 분량만으로 문학 속의 가장 긴 주제를 표현한 것” 같다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 1727)이나 “서술의 ‘가벼움’이 지닌 힘”을 들려주었다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제1악장에 관한 묘사 모두 음악이 그의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구체적입니다.

간혹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그의 본심에 웃음이 터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다행히 브람스에게는 베토벤과 같은 전쟁과 승리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는 문장에서는 그의 취향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갈수록 이성을 잃고 광기가 예술 흐름이 되어가는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억제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면서, 괴담을 멀리한 채 옛것을 고수했다”는 브람스에 대한 그의 평가는 혼란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베를리오즈가 과격한 감정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낼 때 멘델스존은 서술의 억제를 통해 천재성을 펼쳐 보였다”는 문장 역시 적지 않은 교훈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음악에 관한 위화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 언젠가 〈음악 허물기〉에서 소개하는 곡들 함께 감상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음악의 역사는 끝없는 심연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만 그 풍부함을 알 수 있고 경계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작가와 작품 뒤에도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선율과 리듬이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장 우렁찬 이름 뒤편에 수줍어하고 상심하는 이름들도 있으며 그러한 이름들이 대표하는 음악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음악이 내 글쓰기에 미친 영향〉 중에서

How to cite this: 계희승, “음악의 서술,” 『음악학 허물기』, 2021년 8월 11일.


  1.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문현선 옮김(파주: 푸른숲,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