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9월 27일 171번째 방송
오늘 만날 작곡가는 독일의 엥겔베르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매년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어딘가에서 반드시 연주되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Hänsel und Gretel, 1893)의 작곡가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오늘(9월 27일) 세상을 떠났지만 서거 100주년에만 듣기에는 아까운 명곡들을 남겼습니다. 함께 감상해 보시지요.

첫 곡은 1902년 오페라 〈장미 공주〉(Dornröschen)의 ‘전주곡’(Vorspiel). 우리에게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더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징슈필(Singspiel)이지만 조금 과장하면 음악 반 대사 반. 훔퍼딩크 자신도 이 작품을 ‘전주곡과 3막 구성의 동화극’으로 분류했습니다. 군데군데 좋은 음악이 배치되어 있지만 다 들을 수는 없고. 이럴 때는 압축해서 들을 수 있는 전주곡이 그만입니다. 오늘 준비한 작품 가운데 가장 나중에 작곡한 곡인 만큼 완숙함에 접어든 작곡가의 음악 만날 수 있습니다. 카를 안톤 리켄바허(Karl Anton Rickenbacher)가 지휘하는 밤베르크 교향악단(Bamberger Symphoniker)의 연주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워낙 유명해서 훔퍼딩크를 오페라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그는 가곡과 실내악도 다수 작곡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기악 음악 대부분 생전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게 또 숨은 명곡이라는 사실을 최근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1875년 작품 〈피아노5중주〉, G장조, 2악장 Adagio. ‘망자를 기리며’(In memoriam defunctae)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악장은 훔퍼딩크가 19살 때 세상을 떠난 누이 어네스틴(Ernestine)을 추도하기 위해 쓴 곡입니다. 21살에 완성했으니 여전히 어린 나이에 작곡한 음악이지만 과하게 무겁거나 슬퍼하지 않는 절제미를 발휘합니다. 좋은 기억만 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가을에 유독 잘 어울리는 〈피아노5중주〉, G장조, 2악장. 피아노에 힌리히 알퍼스(Hinrich Alpers), 슈만 사중주단(Schumann Quartett)이 함께합니다.
훔퍼딩크는 귀에 쏙 들어오는 음악을 쓰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도 인상적인 선율로 유명한 곡들이 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헨젤과 그레텔의 이중창 ‘저녁 기도’(Abendsegen)를 관현악 버전으로 준비했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헨젤과 그레텔〉은 2019–2020 시즌 독일어권 국가(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오페라라고 합니다.1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나 푸치니의 〈라 보엠〉이 뒤를 이었다고 하니 믿기 어렵지만 사실 국내에서도 매년 어딘가에서 연주될 정도로 자주 무대에 오르는 작품입니다. 아마도 ‘가족 오페라’라는 인식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분명 훔퍼딩크의 오페라가 원작과 많이 다르고 음악도 가벼운 편이라서 ‘어린이 오페라’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작품도 아닙니다.

훔퍼딩크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의 1882년 초연 준비 과정에서 바그너의 조수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훔퍼딩크의 오페라는 때로 바그너 오페라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더 가디언』의 평론가 앤드루 클레멘츠(Andrew Clements)는 훔퍼딩크의 〈장미 공주〉가 〈파르지팔〉을 재해석한 오페라라고 주장합니다.2 〈헨젤과 그레텔〉은 바그너 타계 10년 후 1893년 초연된 작품. 바그너의 어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한 〈헨젤과 그레텔〉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가 관심을 보이고 초연 지휘를 맡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이중창 ‘저녁 기도.’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의 연주로 감상해 보시지요.

기악 연주로 듣는 이중창 ‘저녁 기도’도 괜찮지 않나요? 다음 곡도 ‘밤’을 노래하는 음악입니다. 1879년 이탈리아 유학 당시 작곡한 〈녹턴〉(Notturno), G장조. 원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지만 지금은 바이올린과 현악사중주 버전이 더 자주 연주됩니다. 앞서 감상한 〈헨젤과 그레텔〉 ‘저녁 기도’와 비교하면 밀도가 낮아 아주 가볍게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녹턴이라는 장르의 소품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그너의 영향을 받기 이전 작품이라는 점에서 ‘비포 앤 애프터’를 엿들을 수 있지요. 리디아 두브로프스카야(Lydia Dubrovskaya)의 바이올린, 디오제네스 사중주단(Diogenes Quartet)의 연주입니다.
엥겔베르트 훔퍼딩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자주 듣기 어려운 그의 기악 작품들 만나 봤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만 듣기에는 아깝지 않나요? 미처 소개하지 못 한 훔퍼딩크의 명곡들은 다음에 또 들고 오겠습니다.
How to cite this: 계희승, “엥겔베르트 훔퍼딩크 서거 100주년,” 『음악학 허물기』, 2021년 9월 27일.
Norman Lebrecht, “Most Performed Opera in Covid Year?,” Slipped Disc, July 30, 2021.↩
Andrew Clements, Review of Humperdinck: Dornröschen, Chor des Bayerischen Rundfunks, Munich Radio Orchestra, Ulf Schirmer (CPO, 777 510-2, 2011), The Guardian, February 17,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