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글린카의 피아노 소품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10월 4일 172번째 방송

19세기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걸작으로 거론되는 《이반 수사닌》(Ivan Susanin [=A Life for the Tsar], 1836)이나 《루슬란과 류드밀라》(Ruslan and Lyudmila, 1842)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은 없습니다. 덕분에 오페라 작곡가로 기억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오페라는 이 두 곡이 전부입니다. 소수의 관현악과 실내악을 쓰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가곡과 피아노 소품들. 오늘날 그의 피아노곡은 영국 ABRSM 시험곡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막상 들어보면 글린카가 얼마나 놀라운 작곡가인지 알 수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입니다.

Portrait of Mikhail Glinka by Karl Bryullov, 1840,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자신 있게 준비한 첫 곡은 ‘이별’(La séparation)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1839년 작품 〈녹턴 F단조〉. 1839년은 글린카에게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1835년 결혼을 했지만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없었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지요. 직장 생활도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왕립 예배당 성가대 지휘자였던 글린카를 시기한 라이벌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우울증까지 겪었던 그는 1839년 말, 결국 일을 그만두고 교외에 있는 여동생 집에 머물며 지친 심신을 달랬습니다. 워낙 몸이 약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녹턴 F단조〉, ‘이별’은 명목상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외로 터를 옮긴 여동생을 위해 쓴 작품이지만 정신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가던 클린카 자신을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을에 유독 잘 어울리는 〈녹턴 F단조〉, ‘이별.’ 빅토르 랴브치코프(Victor Ryabchikov)의 연주로 감상해 보시지요.

La separation, Nocturne in F Min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글린카는 러시아에서 서양 고전 음악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녹턴 F단조〉가 딱히 러시아 음악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린카는 20대 초반부터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국제적인 음악 트렌드를 접했습니다. 젊은 시절 잠시 유학한 게 아니라 평생 거주지를 옮기며 활동한 작곡가였지요.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정체성도 결국 19세기 유럽의 흐름 속에서 다져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3개의 푸가〉는 1833–34년 독일에 머무를 당시 쓴 작품입니다. 1830–33년 이탈리아에서 대위법을 공부할 때만 해도 이런 학구적인 양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구사하지도 못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독일에서 갑자기 푸가를 작곡했어요. 그것도 아주 잘 썼습니다. 하긴 그럴 수 있지요? 저도 학부 때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 ‘서양음악사’였는데, 지금은 제 전공(음악이론) 못지않게 좋아하고 심지어 강의도 합니다. 러시아 전통 민요에 기반한 1번 E$\flat$장조 푸가도 좋지만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2번 A단조 푸가가 특히 일품입니다. 반면 바흐 코랄을 연상케 하는 3번 D장조 푸가는 가장 독일스러운 작품. 빅토르 랴브치코프가 연주합니다.

3 Fugues: I. Fugue in E-Flat Maj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3 Fugues: II. Fugue in A Min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3 Fugues: III. Fugue in D Maj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글린카는 1857년 타계한 1804년생 작곡가. 잊기 쉽지만 쇼팽(1810–1849)이나 리스트(1811–1886) 같은 작곡가들과 동시대 인물입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멘델스존(1809–1847), 베를리오즈(1803–1869) 등과 친분을 쌓았고 리스트의 작품도 비엔나에서 먼저 들었습니다. 쇼팽의 작품은 1840–42년 이탈리아 거주 당시 처음 접했다고 회고하는데, 쇼팽의 향기가 느껴지는 1847년 작품 〈4개의 소품〉 중 3번곡 ‘뱃노래’(Barcarolle) 들어 볼까요? 하필 쇼팽의 〈뱃노래〉, Op. 60과 작곡 시기(1846년)가 거의 비슷해 자연히 두 곡을 비교해서 듣게 되지만 글린카가 쇼팽의 〈뱃노래〉를 알고 있었는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건 쇼팽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성의 진행이 쇼팽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빅토르 랴브치코프의 연주로 감상하겠습니다. 기왕 듣는 김에 쇼팽의 〈뱃노래〉, Op. 60도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의 연주로 준비했으니 함께 들어 보세요.

4 Musical Essays: III. Barcarolle in G Maj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Chopin: Barcarolle in F-Sharp Major, Op. 60. Video by Krystian Zimerman – Topic

글린카가 낭만 시대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음 곡도 19세기에 유행한 오페라 주제에 의한 변주곡. 10곡 가까이 썼습니다. 감상할 작품은 〈모차르트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from Die Zauberflöte). 1막 피날레 중 모노스타토스와 노예들이 부르는 ‘이 소리는 아름다워’(Das klinget so herrlich)의 오케스트라 반주 파트를 주제로 한 변주곡입니다. 5개의 변주로 구성된 1822년 버전과 3개의 변주 및 코다로 수정된 1856년 버전이 있습니다. 방송을 위해 선곡한 1856년 버전은 1857년 세상을 떠난 글린카가 남긴 마지막 작품 가운데 하나. 어떤 이유로 34년 전, 18세의 나이에 작곡한 변주곡을 수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힌트는 음악에 있을 겁니다. 오르골 선율(?)로 유명한 테마에 변주도 3개밖에 없어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예쁜 곡. 시간이 부족해 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1822년 오리지널 버전까지 빅토르 랴브치코프의 연주로 감상해 보시지요.

Variations on a theme of Mozart in E-Flat Major (2nd Version for piano).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Variations on a theme of Mozart in E-Flat Major (Original Version).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글린카의 피아노 소품, 들을 만하지 않나요? 몇 곡 안 되지만 실내악도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온라인이라지만 이미 너무 많은 곡들을 소개했으니 그의 실내악은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1843년 작품 〈마주르카 C단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쇼팽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마주르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는 글린카. 여지없이 쇼팽 마주르카를 연상케 하지만 글린카 특유의 달콤씁쓸함이 돋보입니다. 빅토르 랴브치코프가 연주합니다.

Mazurka in C Minor. Video by Victor Ryabchikov – Topic

How to cite this: 계희승, “미하일 글린카의 피아노 소품,” 『음악학 허물기』, 2021년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