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10월 25일 175번째 방송
오늘은 2006년 타계한 영국 작곡가 말콤 아놀드 경(Sir Malcolm Arnold, 1921–2006)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명작 준비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조성 어법을 고수한 말콤 아놀드는 아홉 편의 교향곡을 비롯해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썼습니다. 특별히 그의 주옥같은 영화 음악도 준비했으니 끝까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첫 곡은 가장 사랑받는 그의 영화 음악 중 하나 《여섯 번째 행복의 여관》(The Inn of the Sixth Happiness, 1958)의 ‘런던 전주곡’(London Prelude)입니다. 말콤 아놀드는 1947년부터 1969년까지 100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1957년 영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로 제3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고전 영화 팬이라면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 주연의 《여섯 번째 행복의 여관》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내용 못지않게 음악도 감동적입니다. 일단 들어 볼까요? 리처드 히콕스(Richard Hickox)가 지휘하는 런던교향악단(London Symphony Orchestra)이 연주합니다.
영화 음악은 어쨌거나 영화 형식에 맞추어 작곡되기 때문에 따로 떼어 내면 음악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곡(set pieces) 위주의 스코어는 그나마 특별한 작업 없이 거의 원곡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연주용으로 편곡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섯 번째 행복의 여관》의 스코어도 마찬가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악곡들이 많아 정도는 덜하지만 이 역시 영국의 음악가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 1946–1995)가 연주용으로 편곡한 것입니다. 파머의 편곡은 모두 원작자의 승인을 받은 것이니 안심(?)하고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여담이지만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음악이 유명한 건 사실 들으면 누구나 아는 ‘보기 대령’(Colonel Bogey) 행진곡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에 삽입된 이 행진곡은 릭케츠 중위(Lieutenant F. J. Ricketts, 1881–1945)가 1914년 케니스 알포드(Kenneth J. Alford)라는 필명으로 작곡한 것. 말콤 아놀드의 작품은 아니지만 워낙 유명한 곡이니 듣고 가겠습니다. 리처드 히콕스가 지휘하는 런던교향악단의 연주입니다.
말콤 아놀드의 《여섯 번째 행복의 여관》 스코어가 거의 원곡 그대로 연주될 수 있는 반면 1954년 영화 《홉슨의 사위 고르기》(Hobson’s Choice)의 음악은 반대의 경우입니다. 감상할 연주는 여러 장면에 삽입된 같은 곡의 파편들을 모아 파머가 연주용 모음곡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영화의 메인 테마는 말콤 아놀드 자신의 오페라 《댄싱 마스터》(The Dancing Master, Op. 34, 1952)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흥겨운(물론 사견입니다) 주제와 변주 형식의 ‘윌리와 매기’(Willie and Maggie) 감상하겠습니다. 무지 아름다우니 그냥 들어 보시죠. 리처드 히콕스가 지휘하는 런던교향악단입니다.
1969년 영화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는 말콤 아놀드가 작곡가로 참여한 마지막 작품입니다. 겨우(?) 마흔 여덟에 영화 음악계를 떠난 것인데 귀에 쏙 들어오는 테마만을 원하는 제작자들의 요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왜 영화 음악을 쓰느냐는 질문에 (경제적인 부분을 떠나)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지휘를 할 수 있다고 답했을 정도로 말콤 아놀드에게 영화 음악은 단순한 상업 음악 그 이상이었습니다. 비상업적 예술 음악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길 원하기도 했고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1850년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드라마가 하도 많아서 혼동하기 쉬운데, 말콤 아놀드가 작곡가로 참여한 작품은 랠프 리처드슨, 로렌스 올리비에, 마이클 레드그레이브가 출연한 1969년 TV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스코어 또한 그대로는 연주가 불가능해 영국 작곡가 필립 레인(Philip Lane)이 편곡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연주용으로 재구성된 ‘메인 타이틀과 오프닝’(Main Titles and Opening Scene)에 이어 감상할 작품은 1956년 영화 《트래피즈》(Trapeze)의 ‘로맨스.’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음악입니다. 루몬 감바(Rumon Gamba)가 지휘하는 BBC 필하모닉(BBC Philharmonic)의 연주로 만나 보시죠.
앞서 예고한 대로 오늘 영화 음악만 준비한 건 아닙니다. 말콤 아놀드는 영화 음악 작곡가로 가장 바쁘게 활동하던 시기에도 비상업적 예술 음악을 꾸준히 작곡했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대부분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니 ‘꾸준히 작곡했다’는 표현도 사실 정확하지 않지요. 이쯤 되면 어디 가서 바쁘다는 핑계도 섣불리 댈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콤 아놀드는 엄청난 속도로 곡을 쓴 후 수정도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저는 당당히 바쁘다는 핑계를…
말콤 아놀드가 마지막으로 영화 음악에 참여한 1969년 BBC 프롬 위촉작 《두 대의 피아노(세 손)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2 Pianos [3 hands]), Op. 104를 들어 보면 그의 작품관을 알 수 있습니다. 별칭 ‘필리스와 시릴을 위한 협주곡’은 이 곡의 초연을 맡은 부부 피아니스트 필리스 셀릭(Phyllis Sellick, 1911–2007)과 시릴 스미스(Cyril Smith, 1909–1974)를 지칭합니다. 영국왕립음대 피아노 교수를 역임한 시릴 스미스는 1956년 연주 여행 중 뇌졸중으로 왼팔이 마비된 후 자신의 오른손과 아내 필리스의 두 손을 위한 작품을 위촉하거나 직접 편곡해 연주 커리어를 이어 갔습니다.
《두 대의 피아노(세 손)을 위한 협주곡》은 필리스와 시실의 피아노, 말콤 아놀드 본인의 지휘로 1970년 처음 녹음되었는데 바로 그 음반으로 2악장과 3악장 들어 보겠습니다. 초연 후 5분간 이어진 기립 박수 끝에 앙코르로 선택한 곡이 룸바(rumba) 리듬의 피날레 3악장이었을 정도로 기분 좋아지는 음악. 피아노에 필리스 셀릭와 시릴 스미스, 말콤 아놀드가 지휘하는 버밍엄 시 교향악단(City of Birmingham Symphony Orchestra)이 함께합니다.
2021년 기념일을 맞는 작곡가들 소개하느라 그동안 쌓인 좋은 음악이 산더미입니다. 아직 고르는 중인데 다음 주도 기대하세요. 그 전에 오늘 마지막 곡도 듣고 가시고요. 말콤 아놀드의 1971년 작품 《기타를 위한 환상곡》(Fantasy for Guitar), Op. 107 중 3악장 ‘아리에타 I’(Arietta I). 2분짜리 곡이지만 안 듣고 가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음악. 방송용으로 준비한 숀 쉬버(Sean Shibe)의 연주는 유튜브에 제공되지 않아 요나스 하릴(Jonas Khalil)의 연주로 준비했습니다.
How to cite this: 계희승, “말콤 아놀드 탄생 100주년,” 『음악학 허물기』, 2021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