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11월 8일 177번째 방송
〈음악 허물기〉 3년 반 진행하면서 덜 알려진 작곡가와 작품들 수없이 소개했지만 오늘 만날 작곡가의 인지도는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낮습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 발터 라블(Walter Rabl, 1873–1940). 그냥 좀 냉정하게 말하면 이름을 들어 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작곡가입니다. 작품도 마찬가지. 서른 살에 작곡을 그만두고 전업 지휘자 겸 보컬 코치로 활동하면서 15곡 남짓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준비한 음악은 모두 20세기 이전 작곡한 것. 지금은 사실상 완전히 잊힌 작품들이지만 19세기 말 비엔나의 감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명곡입니다. 일단 들어 보시죠.

첫 곡은 1896년 작품 《클라리넷 4중주》, E$\flat$장조. 비엔나 음악가 협회(Tonkünstlerverein)에서 수여하는 젊은 작곡가상 수상작입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협회 명예회장이었던 브람스. 썩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는 짐로크(Simrock)에 이 작품을 추천해 이듬해 Op. 1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클라리넷 4중주》는 딱히 전례가 떠오르지 않는 클라리넷과 피아노 트리오의 독특한 편성입니다. 첫 음반이 2006년에 나왔으니 집에서 들을 수 있게 된지 이제 겨우 15년. 라블의 이름이 생소한 것도 납득이 갑니다. 브람스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들었는지, 한 번 들어 볼까요? 먼저 감상할 1악장 Allegro moderato는 브람스의 1891년 작품 《클라리넷 3중주》, Op. 114를 떠올리게 하지만 브람스만큼 무겁지는 않아 좋습니다. 벤젤 푹스(Wenzel Fuchs)의 클라리넷, 쥬느비에브 로랑소(Geneviève Laurenceau)의 바이올린, 라슬로 페뇨(László Fenyö)의 첼로, 올리버 트린들(Oliver Triendl)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우리에게는 클라리넷 5중주가 훨씬 익숙하지만 클라리넷 4중주 소리도 매력적이지 않나요? 장송 행진곡을 연상케 하는 주제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변주들로 구성된 2악장 Adagio molto는 또 전혀 다른 소리를 냅니다. 공모전에 제출할 작품의 느린 악장을 주제와 변주로 작곡한 건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느린 악장은 전통적으로 비교적 평범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악장이라 작곡가가 기교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인상적인 선율 쓰는 것 외에는) 많지 않습니다. 라블은 어차피 하나는 있어야 하는 느린 악장을 주제와 변주 형식으로 작곡해 자신의 역량을 뽐내고 있지요. 변주되는 속도도 굉장히 빨라 긴 얘기 짧게 하는 거 좋아하는 제가 특히 사랑하는 악장입니다. 클라리넷에 벤젤 푹스, 바이올린에 쥬느비에브 로랑소, 첼론에 라슬로 페뇨, 피아노에 올리버 트린들입니다.
라블의 다른 작품들도 짐로크에서 줄줄이 출판된 것을 보면 분명 브람스의 추천도 있었지만 그의 작품에 출판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1897년 《클라리넷 4중주》와 함께 짐로크에서 출판된 그의 《환상소곡집》(Fantasiestücke), Op. 2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환상소곡집》이라고 하면 슈만의 Op. 12나 Op. 111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텐데, 총 8곡으로 구성된 라블의 《환상소곡집》은 피아노 삼중주 편성입니다. 그 중 첫 곡과 끝 곡, 1번 Adagio molto와 8번 Allegro vivace con brio 감상할 텐데 8번의 서주격인 7번 Largo도 함께 준비했으니 나름 완결성 있게 들어 볼 수 있을 겁니다. 1번곡 들어 보면 모든 게 설명되는 긴 말이 필요 없는 작품. 쥬느비에브 로랑소의 바이올린, 라슬로 페뇨의 첼로, 올리버 트린들의 피아노 연주로 감상해 보시죠.
만 30세에 작곡을 그만 둔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지휘자로 바쁘긴 했지만 지난주 만난 카를 라이네케(Carl Reinecke, 1824–1910)만 해도 라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휘 커리어를 누리는 가운데 300곡을 넘게 썼으니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작곡가가 작곡을 그만두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니 더 이상 묻지 말고 다음 곡 듣지요. 1899년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D장조, Op. 6 중 3악장 Allegretto grazioso. 세기말 비엔나의 감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인터메초입니다. 쥬느비에브 로랑소의 바이올린, 올리버 트린들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라블의 다른 작품들도 전부 들어 보고 싶은데 음반이 많지 않습니다.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재발견된 작품들. 음반도 2000년대 들어서야 나오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몇 곡 안 돼 들어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별로 없지만 녹음된 작품들 하나하나가 명곡, 명연주이니 들어 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대로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그의 다른 곡들도 녹음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물론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은 아닙니다.
How to cite this: 계희승, “발터 라블의 실내악,” 『음악학 허물기』, 202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