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블루멘펠트의 피아노 연습곡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2021년 11월 15일 178번째 방송

19세기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 1863–1931)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제 관계는 아니고 마스터클래스에서 맺어진 사이.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마스터클래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일회성 이벤트는 아니었으니 사제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블루멘펠트가 50작품 이상을 출판한 작곡가였다는 것. 10곡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습니다. 음반도 사실상 전무하고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습곡 준비했습니다. 연습곡이 다 그렇지만 왼손 아님 오른손을 혹사(?)하는 곡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일단 들어 보세요.

첫 곡은 《3개의 연습곡》, Op. 3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1번 연습곡 D$\flat$장조.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동시에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를 사사,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3개의 연습곡》은 음악원을 졸업한 1885년 완성한 작품. 그 중 1번은 아르페지오 연습곡입니다. 블루멘펠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의 설립자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의 계보를 잇는 음악가입니다. 자연스레 연주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도 루빈스타인의 영향이 감지됩니다. 쇼팽이 발전시킨 피아노 연습곡이 러시아 피아니즘으로 어떻게 재탄생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죠. 다니엘 블루멘탈(Daniel Blumenthal)의 연주입니다.

3 Etudes, Op. 3: Etude in D-Flat Major, Op. 3, No. 1. Video by Daniel Blumenthal – Topic

《3개의 연습곡》은 초기작답게 쇼팽의 영향이 유독 뚜렷하게 들리는데, 오늘 마지막 곡을 제외하고 그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배치했으니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곡은 1889년 작곡한 《연습곡》, Op. 14. ‘바다에서’(Sur mer)라는 부제로 유명합니다. 블루멘펠트의 작품 가운데 지금도 종종 연주되는 인기곡. 앞서 감상한 《3개의 연습곡》과는 불과 4년 차이지만 이미 쇼팽보다는 블루멘펠트로 들립니다. 어느 계절의 바다인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겨울 바다라고 생각하고 들어도 좋은 음악. 다니엘 블루멘탈이 연주합니다.

Etude, Op. 14 “Sur mer”: Etude, Op. 14, “Sur Mer.” Video by Daniel Blumenthal – Topic

연습곡도 잘 못 된 방식으로 과하게 연습하면 팔에 무리가 오게 마련입니다. 다음 감상할 작품 《왼손을 위한 연습곡》, Op. 36은 혹시 블루멘펠트도 부상을 당했던 것 아닌가 의심하게 하지만 비슷한 시기 워낙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겪었던 일이라 유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블루멘펠트와 관련해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왼손을 위한 연습곡》은 폴란드 태생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wsky, 1870–1938)에게 헌정된 1905년 작품입니다(위의 악보). 고도프스키 역시 왼손을 위한 피아노 곡을 다수 작곡했습니다. 앞서 감상한 ‘바다에서’와 함께 가장 자주 연주되는 블루멘펠트의 작품 중 하나.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곡인데 작년에 타계한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1928–2020)의 연주가 음반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 블루멘탈과 플라이셔의 연주 모두 감상해 보시죠.

Etude for the left hand in A-Flat Major, Op. 36: Etude in A-Flat Major pour la main gauche seule, Op. 36. Video by Daniel Blumenthal – Topic
Etude for the Left Hand in A-Flat Major, Op. 36. Video by Leon Fleisher – Topic

왼손을 위한 작품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게 어떻게 한 손으로 연주 가능한가 싶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키릴 게르슈타인(Kirill Gerstein)의 연주를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실 겁니다.

Blumenfeld: Etüde für die linke Hand ∙ Kirill Gerstein. Video by hr-Sinfonieorchester – Frankfurt Radio Symphony

여담이지만 국내 음악회 앙코르 곡의 스펙트럼도 보다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음악 허물기〉 시간에 소개하는 곡들은 ‘중요한’ 혹은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서 연주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간혹 접하는데 앙코르 곡으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앙코르 곡을 위촉하는 경우도 있는데 뻔한 곡 말고 아무도 모르지만 예쁜 곡들 선사하는 것도 청중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어서 감상할 음악은 1912년 작품 《4개의 연습곡》, Op. 44 중 2번 연습곡 D$\flat$장조 Grave와 3번 연습곡 E단조 Allegro. 오늘 준비한 작품 중 가장 나중에 출판된 곡입니다. 2번은 문자 그대로 장중하게 시작해 장중하게 마무리되는 연습곡. 계속해서 같은 패턴이 반복되어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연습곡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참을 만합니다. 《4개의 연습곡》 중 느린 악장을 맡고 있기도 하니 잠시 쉬어가는 곡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반면 3번은 ‘2번이 좀 지루했지?’라고 말하듯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진행됩니다. 다니엘 블루멘탈이 들려 드립니다.

4 Etudes, Op. 44: Etude in D-Flat Major, Op. 44, No. 2. Video by Daniel Blumenthal – Topic
4 Etudes, Op. 44: Etude in E Minor, Op. 44, No. 3. Video by Daniel Blumenthal – Topic

오늘 마지막 곡은 《연주회용 연습곡》(Etude de concert), F$\sharp$단조, Op. 24. 블루멘펠트가 모교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 교수로 정식 부임한 1897년 완성된 곡입니다. ‘연주용’이기 때문에 연습곡의 특성을 갖춘 동시에 대중성도 포기하지 않은 작품으로,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합니다. 지금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음악. 다니엘 블루멘탈이 연주합니다.

How to cite this: 계희승,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피아노 연습곡,” 『음악학 허물기』, 202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