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뮤 뉴스레터 제18호

2021년 11월 15일 발행된 뉴스레터입니다. 원본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노력한다고 되지는 않아요.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개성을 반영한 것이고, 개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개성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하지만 개성이 있다 해도 종이에 개성을 반영하려면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 내야만 합니다. 어찌 보면 얄궂은 일이죠.

—레이먼드 챈들러,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중에서

스타일이 없는 글을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아니라 못 읽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이든 논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챈들러의 표현을 빌면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써 넣고도 그걸 구조에 맞추려고 지독하게 시간을 들이”다 보면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스스로 일어서 걸어가는 효과를 지닌” 무엇을 잃어 간다는 것. 그래서 그는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스타일에 투자하라고 조언하지요.

이번 주 목요일 수능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을 응원합니다. 중요한 시험인 것은 분명하지만 ‘첫발’을 내딛기 위해 거치는 관문일 뿐. 이것으로 자신의 가치가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레이먼드 챈들러는 51세에 첫 소설 『빅 슬립』을 발표한 문학계 대표적인 ‘레이트 블루머.’ 그의 조언대로 “구조에 맞추려고 지독하게 시간을 들이”는 대신 스타일에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유용할”지도 모릅니다.

아래 영상은 프란코 제피렐리 연출 40주년을 기념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 중인 푸치니 《라 보엠》의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장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 감독 김은선의 지휘로 “오 사랑스런 아가씨”(O soave fanciulla) 감상하며 뉴스레터 제18호 시작합니다.

La Bohème: “O soave fanciulla.” Video by Metropolitan Opera

1.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피아노 연습곡

19세기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펠릭스 블루멘펠트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제 관계는 아니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블루멘펠트가 50작품 이상을 출판한 작곡가였다는 것. 10곡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습니다. 음반도 사실상 전무하고요. KBS 음악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178번째 방송에서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습곡 준비했습니다. 연습곡이 다 그렇지만 왼손 아님 오른손을 혹사(?)하는 곡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일단 들어 보세요.


2. 18세기 음악가의 조건, 즉흥 연주

이번 학기 ‘4차 산업혁명과 음악’ 수업이 폐강되면서 나머지 18학점은 모두 ‘분석’ 수업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학부 수업에서는 기초 화성과 캐플린 형식 이론, 그리고 집합이론을, 대학원에서는 여딩엔의 스키마 이론을 강의합니다. 스키마 분석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의 반응이 흥미로운데 18세기 음악, 특히 갈랑 양식 작품들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곡, 연주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재밌어 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만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정해진 음악적 ‘매너’(패턴)을 익히고 이를 조합해 즉흥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모습. 상상이 가시나요? 『피아니스트를 위한 역사적 즉흥 연주 가이드』의 저자 존 모텐슨 시더빌대 교수가 18세기 음악 교육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3. 지휘자 김은선의 메트 데뷔

뉴스레터 제15호에 소개한 대로 지난 11월 9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 감독 김은선의 지휘로 프란코 제피렐리의 푸치니 《라 보엠》 연출 40주년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반응이 무척 궁금했는데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앤서니 토마시니의 리뷰는 찬사 일색. 그의 말처럼 《라 보엠》이 그렇게 지휘하기 어려운 오페라였나 싶지만 대가는 원래 끔직이 어려운 일을 쉬워 보이게 만드는 법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평소의 토마시니와는 달리 테크닉적인 디테일을 자꾸 언급하는 게 좀 걸리는군요. 표면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전제 없이 이루어진 평가지만 ‘이 어려운 걸 해냈다’는 식의 전개는 어딘지 어색합니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몫입니다.


4. 오페라와 음식

미국독립혁명 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저자 피에르파올로 폴초네티 UC 데이비스 교수의 신간 『오페라에서의 음식과 금식』이 시카고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원제는 Feasting and Fasting in Opera: From Renaissance Banquets to the Callas Diet. 오페라 학자 폴초네티는 연회 문화가 오페라의 탄생과 발전 과정에 미친 영향을 분석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면 연회 장면이 없는 오페라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음식을대하는 등장인물의 태도가 그 캐릭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정도이니 폴초네티가 진지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을 위해 체중 감량을 한 마리아 칼라스의 사례 분석이 궁금하군요. 책 소개와 미리보기는 아래 버튼으로 연결됩니다.


5. 팬데믹 시대의 여흥, 1832년 파리에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832년 프랑스 파리. 콜레라의 유행으로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노래와 춤, 풍자가 섞인 통속극 ‘보드빌’(vaudeville)에서 웃음을 찾았습니다. 디지털화된 사료들을 소개하는 온라인 저널 『퍼블릭도메인리뷰』에 게재된 역사학자 블라드 솔로몬의 기고문을 읽다 보면 약 200년이 지난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망하게 됩니다. 굳이 읽을 필요 없이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들만 봐도 충분합니다.


6. ‘음악학 허물기’ DB 업데이트

음악학 연구와 강의를 위한 DB에 17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작품 목록이 추가되었습니다. Teaching > Resources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음악과 질병, 장애의 문화사’ DB에 영국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순환기질 장애부터 시각 장애, 류마티스 관절염, 최근에는 납중독까지 다양한 진단이 제시되었지만 Bäzner의 2015년 연구는 뇌혈관 질환으로 증상 대부분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Medical Humanities > Database (beta)에서 확인하세요.


7. ‘음악학 허물기’에 뉴스레터 동시 발행

지난주 공지한 대로 뉴스레터가 ‘음악학 허물기’에 동시 발행됩니다. 현재 최신호부터 제16호까지 올라가 있고, 뉴스레터에 담긴 내용을 ‘음악학 허물기’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 제1호까지 역순으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음악학 허물기’에서 훨씬 쾌적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달라지는 건 없으니 기존 뉴스레터 구독자는 지금 그대로 받아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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