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서술

예술가의 산문이 언제나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력을 나열하고 취향을 전시하고 편견을 고집하는 글들도 많다. 그러나 일가를 이룬 장인들의 산문은 대체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지난한 숙련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경험적 통찰들이 정직하게 글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생을 헐어 쓴 글의 힘이다.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추천의 글〉 중에서 “생을 헐어” 가며 글을… Continue reading 음악의 서술

음악은 소유할 수 있는가? 『검은 바이올린』

얼마 전 번역, 출간된 프랑스 소설 『검은 바이올린』(Le Violon noir, 1999)을 읽었다. 막상스 페르민(Maxence Fermine)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작가. 프랑스 문학(특히 ‘1950년대 이후’ 프랑스 문학)과는 잘 맞지 않아 멀리하는 편이지만 음악을 소재로 다룬 소설은 빠짐없이 읽으려고 한다. 별다른 고민 없이 집어 든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18세기 말 유럽. 바이올린이 전부인 소년 요하네스… Continue reading 음악은 소유할 수 있는가? 『검은 바이올린』

솔라리스에 각인된 바흐의 시간

러시아의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86)의 『시간의 각인』(1986) 개역판이 나왔다. 일찌감치 『봉인된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독일어 번역본을 중역(重譯)한 것이어서 영문판과 비교해 가며 봐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정판’이라면 고민이라도 했을 텐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재단 공식 완역본’이라니. 더 이상의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 마침 얼마 전 구입한 토비아스 폰타라의 저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공명하는 영화: 음악과… Continue reading 솔라리스에 각인된 바흐의 시간

E. M. 포스터와 음악

대만의 음악학자 충한 차이(Tsung-Han Tsai)의 신간 『E. M. 포스터와 음악』은 험프리 제닝스(Humphrey Jennings, 1907–1950)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티모시를 위한 일기》(A Diary for Timothy, 1945)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라디오 뉴스를 틀어 놓고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잠시 후 ‘열정’(Appassionata)이라는 부제로 친숙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F단조, Op. 57의 1악장이 흘러나옵니다. 음악회 프로그램이 카메라에… Continue reading E. M. 포스터와 음악

편의점의 소리를 듣다

1. 지난 주말에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의 기사 “편의점에서 세상을 쓰다”를 뒤늦게 접하고 부리나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2016)을 꺼내 보았다. 오랜전에 구입해 놓고 미처 펼쳐 보지 못한 책. 늘 그렇듯 와이프가 먼저 읽어버렸다. 2. “소설 『편의점 인간』은 ‘편의점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기사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문장이다. 소리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대목에서… Continue reading 편의점의 소리를 듣다

오페라 속 병든 영웅들

1. 박사학위 논문이 마무리 되어 가던 시기에, 그러니까 논문 제출 후 심사를 기다리던 시기에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아무래도 박사학위 논문을 몇 년이고 울궈먹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더 이상(?) 그럴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을 발전시켜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도교수님께서 종종 말씀하셨다. 2. 박사학위… Continue reading 오페라 속 병든 영웅들

이성을 듣다(를 읽다)

1. 대학원에 진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위 논문은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가장 길고 끔찍한 중요한 글 중 하나다. 특히 인문계열 박사학위 논문이라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분량’에 압도되기 쉬운데, 오죽하면 이 작업 후에는 석사학위 논문이 그냥(?) 기말소논문 정도로 보인다는 말이 있을까. 그런데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2. 지도교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박사학위 논문은 네가 처음이자… Continue reading 이성을 듣다(를 읽다)

David Lewin의 “Morgengruß” 분석

1. 이번 가을 학기에는 정말 오랜만에 음악 분석 수업을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북미 지역에서는 여전히 ‘음악학’이라고 하면 ‘역사음악학’을 떠올리고 ‘음악이론’이나 ‘종족음악학’과의 구분도 명확하지만 유럽에서는 조금씩 흐려지는 추세인 것도 같고 심지어 ‘musicology’와 ‘ethnomusicology’의 구분 마저 더 이상 의미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게 좋은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무튼 이런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누군가 나의 음악학자로서의 정체성이… Continue reading David Lewin의 “Morgengruß” 분석

아침 글쓰기의 힘

1. 이런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면 온라인을 도배하고 있는 허접한 ‘자기계발’ 글로 읽히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 앞서지만 요즘 하고 있는 일이 ‘아침 글쓰기’인 것을 어쩌랴. 2. 9월 1일 개강 전까지 마무리 해야 하는 우리말 원고 두 편과 9월 말까지 완성해야 하는 영어 논문 한 편. 이 세 편의 글은 선택의 여지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므로 방학 때… Continue reading 아침 글쓰기의 힘

존 밀턴과 C. S. 루이스에게 ‘빛’이란?

우리가 획득한 빛은 응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빛에 의해 우리의 지식으로부터 저만큼 멀리 떨어진 것들을 계속 발견해 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존 밀턴, 『아레오파기티카』 (1644) 나름 하드코어(?) 음악이론을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론을 위한 이론’ 아니냐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건네던 문장이다. 빛을 보지 말고 그 빛이 무엇을 비추는지 보라고.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한 이론가들에게… Continue reading 존 밀턴과 C. S. 루이스에게 ‘빛’이란?